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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본성을 찾아서

by 고석근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서


타인을 위하고 더 나아가 오직 타인을 위한 행위만을 도덕적이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니체, <아침놀>



어제 공부모임에서 한 회원이 며칠 전에 자신이 겪었던 부끄러운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식료품들을 사 가지고 집으로 왔는데, 확인해보니 계산하지 않는 것들도 있더란다.


‘어떡하나? 행운인가?’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더란다. 선뜻 백화점에 전화하지 않은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잠시 후 백화점에서 전화가 왔단다. ‘아 그래요?’ 모르는 척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본성(本性) 속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의(義), 옳음’을 배우지 않아도,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려면,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한 회원이 사례를 들었다. 자신은 운전을 할 때, 상대방 운전자가 잘못을 해도 항상 너그럽게 대했다고 한다.

그러다 자신이 사소한 잘못을 한 적이 있는데, 상대방은 가차 없이 보상을 요구하더란다.


그런 일을 겪다보니 자신도 악해지더란다. 그렇다. 선행이 선한 사람을 보증하지 않는다.


백화점에서 잘못 계산한 것을 알았을 때, 백화점에 전화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타고난 본성을 깨워가야 한다. 본성을 잃지 않도록, 매순간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고대 중국의 경전 중용(中庸)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天, 神)의 명령이 곧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의 소리에 따라 살아가면, 우리는 하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중용은 말한다.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본성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道)이고, 이 도를 닦는 것이 교(敎)라는 것이다.


결국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깨워 본성의 소리에 따라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본성이 깨어 있는 사람은 본성의 소리를 거역할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선한 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도와준다는 생각을 하고 남을 도와주게 되면 은연중에 보상을 바라게 된다. 보상이 오지 않으면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고 결국에는 그 분노가 자신과 남을 헤치게 된다.


‘적선(積善)’이라는 말이 있다. 선을 쌓는다는 뜻인데, 흔히 남을 도와주는 행위를 말할 때 쓴다.


진정으로 선을 쌓으려면, 본성을 깨우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본성을 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도 편하고 남의 인정도 받게 되니까. 하지만 그런 선행은 자신의 무의식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게 한다.


어두운 그림자는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남에게 투사되어 남을 비난하고 헤치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실현(自己實現)이다. 본성의 꽃을 활짝 피어가는 삶이다.


호랑이를 사냥하는 사냥꾼은 호랑이를 발견했을 때, 오로지 온 마음을 호랑이에게만 집중할 것이다.


모기가 와서 물어도, 옆에 지나가는 토끼를 보아도, 조금도 마음에 흐트러짐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냥꾼의 마음으로 한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선행’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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