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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by 고석근

호밀밭의 파수꾼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줄까?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아이들이 노는데,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고 어른은 나밖에 없어. 어린아이들은 놀다 보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잖아. 그러니까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다가, 어린아이들이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붙잡아 주는 거야. 호밀밭의 파수꾼인 셈이지.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펜시 기숙고등학교에서 쫓겨난 주인공 홀든 콜필드, 그는 위선과 기만에 찌든 세상을 견디지 못한다.


어린 여동생이 그에게 묻는다. “오빠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한 가지만 말해봐.”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아이들이 노는데,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고 어른은 나밖에 없어...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다가, 어린아이들이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붙잡아 주는 거야.”


그는 끝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정신병자가 되어서야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를 보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생각했다.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는 이 시대의 소공녀 ‘미소’.


새해가 시작되면서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라 미소는 집을 포기하게 된다.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미소는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하는 이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 ‘노마드(도시의 유목민)’다.


전고운 감독은 말한다.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집을 버리는 ‘미소’가 사람들에게 작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소는 잠시 머물 곳을 찾아 ‘가장 순수하고 뜨거웠던 대학교 시절 밴드 동아리’의 친구, 선후배들을 찾아간다.


다들 꿈을 잃고 살아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미소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만, 영화 속의 인물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왜 미소에게서 자신들의 꿈을 보며, 옛날의 뜨거웠던 동아리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현실은 그들에게 아예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 걸까? 노총각인 한 선배는 미소에게 말한다. “연애는 남자친구랑 하고 결혼은 나랑 하자.”


그러자 미소는 냉정하게 대답한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입만 열면 자식 얘기 신경통 얘기가

열매보다 더 크게 낙엽보다 더 붉게

무성해가는

살찌고 기막힌 계절이 왔다.


- 문정희, <중년 여자의 노래> 부분



‘입만 열면 자식 얘기 신경통 얘기’


젊은 청춘들은 다르게 살았으면 좋겠다.


주름진 얼굴로 꿈을 얘기하는 중년의 소공녀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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