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아서

by 고석근

‘삶의 의미’를 찾아서


조에(zoe)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bios)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 조르조 아감벤,『호모 사케르』에서



미국의 작가 웬디 페퍼가 지은 그림책 ‘통나무의 일생’을 보며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어느 깊은 숲 속에 커다란 떡갈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어요.’


다람쥐 가족은 떡갈나무 줄기에 있는 구멍에서 살고, 고슴도치는 떡갈나무 가지를 갉아 대고, 일개미들은 나무껍질 밑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어디서 나타난 풍뎅이는 떡갈나무 밑으로 파고들며 굴을 만들고, 물과 공기가 이 굴 안으로 스며든다.


곰팡이들과 버섯들이 축축해진 이 굴 안에서 살아간다. 달팽이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와 그 안의 곰팡이를 먹는다.


한 세계를 이루고 있는 떡갈나무 한 그루.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치고, 떡갈나무는 통나무가 된다.


통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하얀 알들을 옮기고, 지네들은 축축한 땅과 통나무 사이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봄이 되자 풍뎅이들이 찌르륵 찌르륵 소리를 내며 하늘을 날아다니다 통나무로 들어와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오래된 통나무는 지네들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준다. 그리고 개미들은 지네들을 먹고 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번씩 지나갔다. 통나무 속이 흐물흐물해지고, 나무껍질은 약해져 땅으로 떨어졌다.

지렁이들이 모여들어 흙을 삽질하는 것처럼 뒤엎기 시작했다. 10년쯤 지나자 통나무는 기름진 흙더미가 되었다.


어느 가을 날, 떡갈나무에서 도토리 한 알이 떨어지고, 다람쥐 한 마리가 떨어진 도토리를 기름진 흙 속에 묻었다.


떡갈나무 싹이 돋아났다. 자라고 자라서... . 또 다른 한 그루의 커다란 떡갈나무가 살게 되었다.


떡갈나무의 일생은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떡갈나무는 언제 봐도 의연하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한 세상을 이루고 살다가, 후손을 남기고 당당하게 죽어 가고 있는가?


인간의 생명은 두 개다. 인간의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조에)’과 ‘사회정치적 생명(비오스)’이 있다.


인간은 조에, 단순히 생명 유지의 삶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비오스, 의미 있는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인의 우울과 권태는 자신의 비오스에 대한 불만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던 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돈이 들어섰다.


하지만 인간이 돈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육체의 생명을 넘어 영원과 연결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유한한 육체적 삶과 무한한 영적인 삶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을까?


신화가 오랫동안 이 두 삶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이 신화를 대신할 수 있을까?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과 벗하지 말라.

절반의 재능만 담긴 작품에 탐닉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죽음을 죽지 말라.

절반의 해답을 선택하지 말고

절반의 진리에 머물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 칼릴 지브란, <절반의 생> 부분



현대인의 절망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절반의 생’에 있을 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하루의 평안을 기원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은 그 무엇에도 전체의 생을 다 걸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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