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과거에 있다
“친척과 친구들이 시체 앞에서 춤을 추는 나를 말렸어요. ‘조르바가 미쳤군, 돌아버렸어.’ 사람들이 웅성거렸어요. 하지만 춤을 안 췄더라면 난 미쳤을 거예요. 첫아들인데 세 살에 죽었거든요. 너무 슬펐어요. 보스, 이제 내 말이 이해됩니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세 살 난 첫아들이 죽었을 때 춤을 춘다. 친척과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조르바가 미쳤군, 돌아버렸어.”
조르바는 변명을 한다. “하지만 춤을 안 췄더라면 난 미쳤을 거예요. 너무 슬펐어요. 보스, 이제 내 말이 이해됩니까?"
오로지 몸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자. 그들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구 몸부림을 친다.
울부짖으며 춤을 추는 것이다. 온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눈물범벅의 얼굴로 쓰러져 잔다.
그들은 한참 후 말간 얼굴로 깨어난다. 그들은 태초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들 앞에는 언제나 신나는 놀이가 있을 뿐이다.
조르바는 니체가 말하는 최고의 인간, 아이다. 아이의 지혜를 의례화한 것이 우리의 장례식이었다.
2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집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식을 했다. 우리 형제들이 한참 곡을 하고 있는데, 술에 취하신 노인분이 다가오셨다.
그분은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곡소리가 너무 적어, 크게 해야지!”
우리는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슬픔에 젖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우리 몸이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이따금 장례식장에서 고스톱 치는 광경을 볼 때가 있다. 꼴불견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서도 집단지성이 발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장에서 며칠 동안 슬픔에 젖어 있다 보면, 몸이 상할 수 있다. 몸이 상하게 되면 그건 망자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상중의 가족들이 대놓고 웃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문상객들이 고스톱을 치며 그분들을 위해 웃게 하는 것이다.
조르바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런 의례는 필요 없을 것이다. 희로애락의 표현이 자유로울 테니까.
하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은 의례가 필요하다. 여러 의례를 통해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이 몸속 깊숙이 쌓이게 된다. 적절하게 애도하지 않은 슬픔은 썩지 않는다.
우리 몸속에서 악취를 내뿜게 된다. 우리의 몸이 상하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다.
희망은 과거에 있다. 우리는 가끔 생각한다.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망상에 젖게 한다.
과거를 바꿔야 한다. 과거를 바꾸다니? 공상 아닌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있다.
80대 노모를 항상 원망하는 60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제나 오빠만 챙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사실일까? 언뜻 보면 사실 같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자. 노모가 아들딸을 차별했기에 그녀는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다.
공기업의 부장직에 오르고 자신의 딸은 자존감 강한 여성으로 기를 수 있었을 것이다.
크게 보면, 그녀를 키운 것은 노모의 차별 대우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녀의 오빠는 나약한 초로의 노인이 되어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음은 마음으로 엮여 있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 떠나세요.
길을 나서는 것이 자유로운 이에겐
행복이 가득 준비되어 있어요.
- 안나 아흐마토바, <마음은 마음으로> 부분
‘마음은 마음으로 엮여 있지 않아요,’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옥죈다.
우리는 길을 나서야 한다. 그러면 마음도 함께 따라나선다. 길에는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