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삭풍이 몰아치는 광화문 광장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나와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국민들의 처절한 모습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52년 12월에도 이제는 철거되고 없는 포탄자국에 일부가 손상된 중앙청 앞 광장, 지금의 광화문 앞 광장에서 대통령부터 손에 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어린 학생들까지 거대한 군중들이 삼삼오오 광장에 집결하고 있었다.
미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아이크)의 방한에 맞추어 대대적 환영행사를 전쟁 중인 나라에서 준비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미 8군 사령부가 있는 동숭동 서울문리대 건물로 곧장 향했다. 전란에 휩싸인 약소국 대통령과 국민들은 통일을 향한 일념으로 12월의 추위를 견디며 군인출신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트루먼 행정부의 제한전을 풀고 북진통일의 총력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메시지를 한국민에게 발표할 것이라는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었지만 외교의 달인 우남마저 속수무책으로 엄동嚴冬에서 중앙청 앞 광장에 모인 국민들을 연설로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방한소식은 피난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던 1908년 1월생에게도 빠르게 전해지면서 미국의 정권교체가 되면 이 지긋지긋한 소모전에서 벗어나 통일을 향한 전기轉起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잠시 가슴이 설레었지만 아이젠하워가 환영식 행사도 불참하고 1908년 1월생의 모교, 동숭동 서울문리대가 있는 8군 사령부로 갔다는 불길한 소식에 한껏 가슴을 졸였다.
가장 과격한 외교라고 할 수 있는 전쟁 중에 펼쳐지는 합종연횡合從連橫 이합집산離合集散 이이제이以夷制夷 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외교술은 또 다른 전쟁, 초한전超限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피아의 구분도 무색할 정도로 오로지 국익을 앞세운 협상력만 존재할 뿐이다.
스탈린의 장기판 위 반상의 말로써 기능했던 김일성과 마오쩌둥의 좌충우돌 공격에 맞선 스탈린과 동갑내기 맥아더가 지휘한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한군전쟁의 영웅 뒤에는 한성감옥의 사형수 출신이자 망국의 독립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오로지 지력과 실력으로 미국 대통령과 장군들을 회유하고 설득하면서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성취한 우남이 있었다.
1875년생 우남은 1890년생 아이크가 오지 않자 백선엽 장군을 대동하고 곧바로 8군 사령부로 아이크를 예방했고 다음날 전선시찰차 수도사단을 방문한 아이크를 영접했으며 특별히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아이크에게 선물한다. 미국인들의 국기의식을 잘 알고 있는 우남은 새하얀 한국 비단에 4괘와 태극을 일일이 수놓은 태극기를 건네자 아이크가 한 손으로 받으려 하자 이 노회 한 외교의 달인 우남은 국기는 두 손으로 받는 것이라며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후 미군 장병들과 한국군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태극기를 아이크에게 선물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잊지 말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 남북통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를 미 대통령 당선자 아이크에게 전달하고 국군의 증강계획까지 약속받았다.
방한 마지막날 출국인사 없이 공항으로 향하던 아이크의 차를 황급히 돌려세운 우남은 기어코 경무대 뜰앞에서 아이크를 만나 그의 각료들을 소개하고 휘황한 불빛과 함께 한국군 3군 의장대와 밴드, 카메라맨들을 동원하여 한미정상회담의 멍석을 깔아버렸다. 당황한 아이크 일행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언제 준비하였는지 우남은 두툼한 보고서를 꺼내 들고 '정상회담‘을 시작하였다. 휴전협상과 남북통일, 그리고 한국군의 증강과 경제재건 계획까지 설명을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몰랐다. 아이크는 그 보고서를 수행하는 보좌진에게 맡기고 차에 올라야 했다.
72시간의 한국 방문에서 결코 만만하지 않은 약소국 대한민국의 지도자 우남과 의도치 않은 시간 의도치 않은 장소에서 조우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한국민들과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그의 대선공약 사이에서 어떻게 미국의 국익을 실천해야 할지 미국으로 돌아오는 태평양 상공에서 번민으로 뒤척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