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판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인생은 B와 D사이에서 C를 하고 사는 것이다. 태어나서 Birth 죽음 Death에 이르는 동안 끝없는 선택 Choice을 하면서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고 잘한 선택 하나로 평생을 안온安穩하게 살기도 하는 것을 보면 선택, 나아가 판단이라는 것의 무서움을 느낀다.
자연은 원래 무자비함을 특징으로 한다. 무자비한 자연 앞에서 유약하기 짝이 없었던 인류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그저 두 귀도 모자라 마음의 귀까지 열어두고 듣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가면서 생사를 개척하고 활로를 뚫어가면서 생존했다. 대를 이어가는 지난한 유전정보적 여정에서 우리의 감각기관은 얼굴을 중심으로 최적화되었고, 최적화된 이목구비를 총 동원하여 원시인류는 살아남았으며 수십억 년의 진화의 여정에서 뇌와 손의 공진화를 통해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은 물론 유전정보적 사슬에서 벗어나 뇌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초보적 가상세계인 문명을 만들었고 이 문명은 뇌정보적 원리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에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갈고닦았던 유전정보적 섭리는 점점 더 퇴색되기 시작했다.
적자생존과 용불용설이라는 말의 의미야말로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원리를 함께 아우르는 진리이다. 가상은 껍데기요 실상은 알맹이지만 가상과 실상 세계에서 함께 작동되는 원리와 섭리는 가상과 실상의 점유율에 따라 널 뛴다. 물론 대세는 가상 세계가 세력을 넓히고 실상의 영역은 점점 더 쪼그라들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체가 살아 숨 쉬는 한 우리의 실상도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팩트이다.
2003년은 문명사적으로 세계가 우왕좌왕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한 한 해였다. 국내적으로는 87 체제의 5년 단임제 대통령은 이미 임기 중반을 넘어가면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고 측근들과 가족들 심지어 본인까지도 사법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운 징크스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결승전 직전에 벌어진 제2 연평해전에서 참수리정 해군용사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한 도발 상황에서 국군 통수권자가 자리를 비우고 도쿄로 날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처신이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한반도 백년전쟁에서 늘 자리를 지켜야 할 자가 제자리에 보이지 않는 전통 또한 쉼 없이 반복되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게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국호가 그대로 응원구호가 되어 입에 익게 되고 더 이상 한국이라는 국호는 낯설게 되어가고 있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은 한국 정치사에서 일종의 세대교체였다. 오랫동안 3김 보스정치가 한국정치를 지배했고 지역기반의 한계를 드러냈던 구 정치지형이 어느 정도 변화를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오래된 지역갈등 구도를 해소하기에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대통령이 바뀌는 어수선한 시기인 2월 18일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 역에서 방화로 인해 192명의 사망자와 14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일어났다. 장난 같은 방화범의 객차 내 방화를 막지 못하고 불길이 일어났고 때 마침 반대편에서 들어오든 열차가 몰고 온 바람으로 순식간에 맞은편에서 진입하던 지하철 객차에 옮겨 붙으면서 유독성 연기가 지하공간을 가득 채웠고 깜깜하게 암전 된 지하공간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발생한 대참사가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이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인명 피해가 큰 철도 사고이자 세계적으로도 1995년 바쿠 지하철 화재에 이어 가장 큰 대형참사로 기록됨과 동시에 인재에 의한 사고로는 1995년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역대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기록한 참사였다.
9.11 테러로 공격당한 패권국 미국은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데 이어 1차 걸프전의 숙제를 마무리하려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패권국 미국 마저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그림자를 상대로 마구잡이로 힘을 행사함으로써 스스로 국제 규범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였다.
2003년에 출범한 참여정부는 초기부터 여러 난제에 휘말렸다. 이라크 파병 찬반논란을 비롯해 대북송금 특검, 불법 대선자금 수수, 한총련 합법화, NEIS 파동, 노동계와의 갈등, 송두율 사건 등 여러 정치 사회적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당내에서 친노와 동교동계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결국 친노 인사들이 2003년 11월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동교동계와 결별하게 된다. 이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가져와 87 체제 이후 두고두고 대통령제의 아킬레스근으로 국민들에게 다가와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가 우왕좌왕하며 국익이 훼손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매국부역세력들이 발호하여 대한민국을 번번이 혼란에 빠지게 하면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세상의 원리는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욕심과 탐욕으로 깔끔한 결정을 하지 못하면서 두 손에 떡을 들고 다른 떡을 잡으려면 손에 쥐고 있는 떡을 내려놓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이리 몰리고 저리 쓸려가는 우왕좌왕하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의 도가니를 기어이 만들어 또다시 한반도 백년전쟁이라는 일상의 전쟁 속으로 우리 모두를 내몰고 있지는 않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