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02학번에 이어 오존 03학번을 넘어 드디어 공포 04학번까지 대학교에 입학하던 2004년이 밝았다. 2004년은 3월의 노무현 탄핵과 5월의 탄핵기각 사이에 엄청난 정치적 공방과 국민적 분열로 시작되었고 어렵사리 대통령이 탄핵의 강을 넘어 복귀하자마자 이라크 팔루자에서 납치된 한국청년 김선일의 안타까운 절규가 방송을 타고 전 국민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 인류가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큰 능력을 한 가지만 꼽자면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많은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공감하지 않으면 일단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인류는 진화했고 문명은 진보했다. 인류의 진화와 문명의 진보 이면에 있는 공감의 능력은 인간을 사람답게 했으며 문명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이처럼 문명의 원리는 세상 속의 인간들을 공감시켜 눈덩이처럼 부풀리고 기댈 언덕을 만들어 세력을 규합하면서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킨다. 따라서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감을 먹고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공감이 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동체의 단합을 외치는 자와 공동체의 분열을 획책하는 자를 주권자 국민들이 알아차리는 것이 공동체의 흥망을 좌지우지한다.
패권국 미국이 대테러 전쟁의 연장선으로 일으킨 2차 이라크 전쟁은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제거했지만 피는 피를 부르듯이 제거된 이라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주로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공개처형하는 장면을 낱낱이 전 세계인들에게 중계방송하면서 미국과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미국의 동맹국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써 민간인 납치라고 하는 가장 약한 고리를 악용했다.
2004년 5월 31일에 김선일은 이라크 팔루자의 미군부대에 군수품을 납품한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납치되었다. 식료품 배송 작업을 위해서 미군 캠프에 출장을 간 후 김선일은 미국 기업이었던 KBR 소속 차량 4대와 무리를 지어 돌아가고 있던 길에 피랍되었다.
납치초기에 골든타임을 놓치고 소속사 가나무역의 안이한 대처와 정부의 늑장대응이 겹치면서 이 한국청년의 목숨 값이 이라크 파병철회라고 하는 대한민국 국익과 맞바꿔야 할 정도로 사태가 커진 뒤 정부가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결국 이 청년은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이 보는 가운데 참혹하게 죽어갔다. 한 달간에 걸쳐 납치된 대한민국 청년이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구명을 호소했지만 모든 과정을 위성중계를 통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안방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대응도 하지 못했던 정부와 국민들이 느꼈을 무력감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의 열기 속에 대~한~민~국을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외쳤던 국민들의 가슴을 후벼 팠으며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너머 온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공포로 다가왔다.
2004년 4월 1일, KTX가 개통되면서 대한민국은 고속철도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고속철도 사업이 1992년에 시작돼 12년이라는 긴 시간과 13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부은 끝에 전국이 두 시간 반 생활권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로써 비행기에 의존해 있던 한국의 교통에 큰 변화가 생겼고, KTX를 개통하면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로 고속철도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또,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빠른 고속철도에 이름을 올렸다. 2004년, MBC의 허준, 대장금과 KBS의 겨울연가, 풀하우스 그리고 천국의 계단 등을 비롯한 대한민국 문화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정예 1군 멤버들로 구성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평가전에서 3:1로 격파하는 이변을 보여준 사건도 이해에 벌어졌다. 이 경기를 통해 독일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 패배한 기록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초의 독일전 승리 기록과 더불어 2002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독일에게 1:0 석패하여 월드컵 결승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을 통쾌하게 설욕한 경기였다. 3월 22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한국은행이 지난 2003년에 학원이나 과외 등에 들어가는 사교육비가 무려 10조 원에 달했다고 발표하였다. 서울중앙지법은 재독 좌파사회학자 송두율 교수에게 북한 찬양사실을 인정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6월 23일 불량만두 제조로 많은 비판을 받은 만두 제조업체 사장이 한강에 투신했다. 옛 삼풍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주상복합건물 아크로비스타가 주상복합 사기분양으로 몰매를 맞았다. 9월 19일 대구광역시 달성공원에서 벤치에 놓여있던 원예용 살충제 메소밀이 든 요구르트를 마신 노숙자가 사망하였다.(대구 달성공원 독극물 요구르트 사건). 12월 29일 국회는 '일제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을 의결하였다.
2004년 12월 26일 오전 8시, 크리스마스 휴가기간에 초대형 쓰나미가 인도양을 강타했다. 최대 높이 50m, 아파트 20층만 한 파도가 해안가를 덮치고 지진을 타고 온 파도는 육지의 모든 것을 할퀴었다. 집도 가족도 모두 한순간에 물속으로 휩쓸려 갔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앞바다에서 발생한 규모 9.1 강진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 12개국을 강타했다. 쓰나미는 인도양을 가로질러 소말리아, 케냐, 탄자니아 등 동아프리카에까지 도달했다. 사망자는 최소 23만 명, 실종자는 무려 5만 명이 넘는다. 200만 명 이상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최대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에선 17만 명이 숨졌다. 한국에서도 태국 푸껫 등을 찾았던 관광객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60여 개국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2004년 쓰나미가 발생한 이후 조사 결과 해구에서 최대 1,300㎞ 길이 단층대가 한 번에 평균 15m 이상 이동하면서 초대형 재해가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판 전체가 움직이며 태국 푸껫과 방콕은 각각 32㎝, 9㎝씩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지구 자전축이 2.5㎝ 움직였고, 이에 따라 자전주기가 2.68㎲(마이크로초·10만 분의 2.86초) 짧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난 중 하나로 꼽히는 미증유의 재난을 목격하면서 우리 인류는 자연의 공포에서 여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하였고 전 지구촌이 자연과 문명의 공포를 함께 겪고 공감한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