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단단히 각오하고 준비했음에도 첫 번째 위대한 낙오자가 발생하기까지는 의외로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 평균 15시간이나 되는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완전무장한 전사로 거듭 태어나 거침없이 시장으로 돌진하자마자 하나둘 부상당한 채 되돌아왔다. 외상은 없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부상병들의 자리는 짧은 시간 내에 새로운 예비 전사들로 채워졌다.
이른바 우리는 그 첫 전투를 일컬어 베이스 마켓(Base Market)이라 불렀다.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시장이란 뜻으로 가족과 친척, 혹은 친구와 지인이 그 대상이었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성공을 빌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성공을 빌고 있었다. 그들은 영업 첫날 자신을 찾아온 우리를 나약한 전사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위해 한마디 애정 어린 훈수를 두어주었다.
“영업이란 말이야... 모르는 사람한테 가서 하는 거야. 그러니 아는 사람들 찾아다니지 말고, 진정한 영업을 해보란 말이야. 1년 이상 버티면 그때 다시 찾아오라고. 아니, 정 필요하면 하나 해줄까?”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오랜 시간 피땀 흘려 받은 교육을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려 보낼 만큼 강력했다. 우리는 교육받은 대로 그들을 찾아갔지만, 그들의 충고 앞에서 교육받은 대로 상담은 하지 못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오래 전에 헤어진 옛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를 어렵게 구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반갑게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일단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영업을 위해 전화를 돌린 것은 일종의 용기였다. 그녀는 그사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서울시 공무원으로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좀 더 주고받았고, 다음날 만나기로 했다. 나는 영업 얘기는 하지 않았고, 그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식으로 만날 약속을 얻어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와 통화한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천년 같이 느껴졌다. 옆에서 내 통화를 지켜보던 매니저가 칭찬을 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나는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베이스 마켓 전투에 있던 터라 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하다고, 그런 똥 자존심을 내세워서는 영업을 못 한다고 여러 번 지적한 뒤라서 그도 조금은 신이 나보였다.
하지만 해냈다는 기쁨도 잠시 나에게는 엄청난 후회와 걱정이 밀려왔다. 그녀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만나서 난 지금 보험 영업을 하고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가 실망해서 ‘그것 때문에 이렇게 날 만나자고 한 거야?’ 하며 투덜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니, 나를 측은하게 생각해서 ‘영업 힘들지? 지금 당장은 필요 없는데 너니까 하나 해줄게’ 하며 선심을 베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날 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고, 만날 장소에 나가지도 않았다. 대신 내 영업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내가 보인 비겁함을 통탄하며, 좌충우돌 그렇게 한동안을 보내야 했다. 심하게는 적성이라는 편리한 합리화를 들먹이며 영업을 포기하려까지 했다. 물론 매니저에게는 만나고 왔다고 말했다.
첫 전투에 관한 교육 지침은 이랬다. 세일즈맨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이 최초 1년 동안 체결한 계약의 대부분은 베이스 마켓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그들에게는 유리한 조건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그들의 생활 상황과 가족 구성원 등을 잘 알고 있어서 상담 시 적절한 대응이 가능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호의적이다. 그들은 당신이 자신들을 위해 일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모든 가족과 친척, 혹은 친구와 지인의 명단을 정리하여 가망고객으로서 또는 소개 제공자의 후보자로서 만나야 한다. 특히 그들은 가망고객의 발굴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키맨으로 성장할 것이다. 열심히 그리고 성의 있게 일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당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성공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가망고객의 발굴을 위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어리석은 세일즈맨이나 하는 짓이다. 그것은 정신이나 마음이 아닌 육체의 활동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영업이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노력한 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 개척할 시간이 있다면, 소개 확보를 위해 기존고객을 방문하는 것이 더 낫다. 가망고객의 발굴에 최고의 전략은 기존고객으로부터 강력한 소개를 받는 것이다. 고객에게 소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당신이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시장은 베이스 마켓을 의미하는 X시장, X시장에서 소개받은 가망고객으로 구성된 Y시장, Y시장에서 소개받은 가망고객으로 형성된 Z시장이 있다. 시장은 필연적으로 X, Y, Z의 순서로 진행된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망고객을 소개시켜 줄 리가 없다. 서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다. 그러니 당신과 오랫동안 신뢰를 쌓은 X시장에 먼저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X가 없는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시장임은 인정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첫 고비를 잘 넘기길 바란다.
교육 지침은 전적으로 옳았다. 12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회사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가장 효율적인 영업 방식을 구축했던 것이다. 시장을 개척하기보다는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는 X시장에서 출발하여 강력한 소개를 통해 시장을 넓혀간다는 전략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우리였다. 우리는 X시장을 너무도 만만히 보았다. 안이하게 접근했다. 그래서 우리는 단 한 차례의 거절에도 마치 예상 밖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급기야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 무서운 만큼 우리는 X시장을 애써 피해 Y시장이나 Z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그러나 교육 지침은 옳고도 옳았다. 우리는 매번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개척도 해보았다. 역시 효과는 없었다. 강도 높은 거절을 당한 몇몇은 아예 원점으로 되돌아오지도 못했다. 그길로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져갔다. 가까스로 낙오만은 면해 원점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져보았다. 체력은 아직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이라 쌩쌩했다. 우리는 또 서로의 정신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정신력은 워낙 교육을 많이 받은 지라 역시 쌩쌩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흔들리고 있는가.
나는 옛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깬 날로부터 몇 일 동안 이 문제를 안고 살았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베이스 마켓은 가서 깨지고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도 빗겨갈 수는 없는 시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예전 대학 은사께서 어린 제자인 나에게 해준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 인간이 하는 활동을 보통 육체의 활동과 정신의 활동, 이렇게 둘로 나누지 않는가. 그런데 정확히는 하나가 더 있다네. 아주 소중한 하나가 더 있어. 바로 마음의 활동이네.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육체를 사용하고, 정신을 사용하고, 마음을 사용하지.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걸세. 말하나 마나 잘 사용해야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존재들이 아니어서 종종 그것들을 어리석은 방법으로 사용하곤 한다네. 서로 부대끼고 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육체를 다치게 하고, 서로의 정신을 갉아먹고, 서로의 마음에 흠집을 내고 말지. 그놈의 갈등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 난 거네. 그렇다고 아주 절망적이지는 않네. 최소한 육체와 정신에 있어서는. 왜냐하면 그 둘은 상처를 입어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거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체력과 정신력이 그 걸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원상회복도 가능하다네. 진짜 걱정은 마음이네. 마음은 육체나 정신처럼 상처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거든. 한 번 다치면 너무 아프고, 너무 오래간다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걸세. 그런데 말일세, 너무도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의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주고받는다는 거네. 우리랑 상관없이 사는 남과는 마음의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네. 너무 웃기지 않은가? 부모지간, 부부지간, 형제지간, 친구지간, 연인지간, 사제지간, 동료지간. 서로를 가장 아끼고 기대하면서, 아끼고 기대한 만큼 마음의 상처를 주고 만다네. 요즘 자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 마음의 상처는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으로 극복하는 거라네.”
해답은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X시장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체력으로도 정신력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아물지 않는 상처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하는 거절 하나도 더 크게 느껴지고, 가장 믿었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이 하는 충고는 충고가 아닌 일종의 배신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극히 정상적이었고, 우리가 비정상적이었다. 그들은 Y나 Z시장의 사람들과 같이 필요 없으면 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업에 관해서 우리보다 몰라도 한마디 훈수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 하나만 믿고, 당연히 살 것이라는 단정을 하며 그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옛 은사께서 말씀하신 마음가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운동으로도 교육으로도 강화할 수 없는 마음이란 영역은 새로운 그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베이스 마켓에서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마음가짐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엉뚱하게도 쉽고, 간단했다. 마음가짐은 그 누군가를 대상으로 두고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려 내 자신에게 설정하는 것이었다. 마법사의 주문같이, 혹은 아이들의 장난같이.
“나는 오늘 최선을 다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겠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원래 그런 거랍니다. 그래도 약간 떨리니 주문은 외워야겠습니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링컨! 나 링컨은 가난한 켄터키 주의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학력은 겨우 초등학교 중퇴입니다.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몸도 허약했습니다. 그래도 독학으로 열심히 법률공부를 했습니다. 잡화점을 차렸는데 빚만 지고 망했습니다. 빚 갚는 데 15년 걸렸습니다. 하는 일마다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불행하게 끝이 났습니다. 다시 소규모 사업체를 차렸는데 또 망했습니다. 지지리 궁상이었습니다. 측량기사로도 일했습니다. 우체국 직원으로도 일했습니다. 일하면서도 공부는 계속했습니다. 변호사가 됐습니다. 용기를 얻어 하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또다시 도전하여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선에서 낙선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오랫동안 병신처럼 살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상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낙선했습니다. 부통령에 입후보했습니다. 패배했습니다. 또다시 상원의원에 출마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게티즈버그에서 역사에 남을 위대한 보험 상담을 했으나 당시 고객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링컨!”
나는 고객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몇 번씩이나 이런 식으로 노래하고, 중얼거렸다. 마음은 힘을 담아 놓을 데가 없어서 수시로 주문을 외워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Y시장에도, Z시장에도 마음의 상처는 있었다. 좀 유치해 보였으나 효과는 좋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자포자기식의 투덜거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풍차를 보고 돌진하던 돈키호테가 풍차를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목청껏 내질렀던 고함에 가까웠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분명 삶에 대한 열정이었다. 열정은 교육받은 정신에서, 강건한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에서 비롯됨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 난 내 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열정이란 갈대처럼 한없이 흔들리는 마음이 차마 꺾이지 않으려 흔들리는 이 몸은 어쩔 수 없으니 저 부는 바람을 멈추게 해야겠다고 난리를 피워대는 것과 같다.’
한참이 흐른 뒤, 나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녀가 일하고 있는 동사무소를 찾았다. 반가웠다. 그녀는 예전보다 살이 좀 붙어 있었다. 난 보기가 좋았는데, 그녀는 약간 쑥스러워했다. 우리는 함께 점심식사를 했고, 차를 마셨다. 우리는 서로 뒤질 새라 친구들 소식을 물었다. 갑자기 그녀가 지난번에 왜 약속을 어겼냐고 물었고, 나는 내 명함을 건네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도 여러 번 노래하고 중얼거렸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정말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 준비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 회사 되게 유명하더라. 그리고 참, 내 옆에 앉아 있는 직원도 전에 한 번 얘기하던데, 가입했나. 내가 물어볼게.”
나는 대학생 시절 그녀와 이별을 하고 한참을 힘들어했다. 그때 내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시던 대학 은사께서 나를 위로하며 해주신 그 말이 또다시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