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장_자동환전의 시대, 디지털 화폐의 명암

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by rio


돈은 시대의 얼굴을 닮는다.

조개껍데기에서 금화로, 금화에서 종이로, 다시 종이에서 숫자로.

그 변화는 단순한 물질의 진화가 아니라, 사회가 신뢰를 주조하는 방식의 변화였다. 그런데 지금, 그 숫자조차 더 이상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중앙 시스템, 더 정확히는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이 그 흐름을 감시하고, 운용하고, 조건부로 통제할 수 있는 코드로 진화하고 있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이 흐름의 정점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익숙하다. ‘카드 없는 결제’, ‘간편한 송금’, ‘빠른 지원금 지급’이 모든 기능은 이미 시장에 퍼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과거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존의 은행 시스템은 민간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며 금융과 통치 사이에 일종의 완충지대를 제공해 왔다. 그런데 디지털 화폐가 전면적으로 도입되면, 그 완충지대는 사실상 제거된다. 중앙은행은 이제 기술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계좌를 직접 개설하고, 자금 흐름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필요시 그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다. 비트코인 등의 시장성은 종이화폐를 넘어 유한성을 지닌 하나의 디지털 화폐의 기준이 될 것이다.

즉, 세계 실물 경제의 기준이 각 나라의 경제 상황이 아닌 단순 코인의 거래량으로 덮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생긴다.

단지 기술의 진보로만 이해해도 괜찮은가? 이 변화는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서, 통제와 감시의 권한을 더 밀착된 형태로 재구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사고, 왜 샀는지까지 한 시스템이 판단할 수 있다면

그 판단의 주체가 인간이든 인공지능이든 그 사회는 과연 여전히 자유로운가?

통화가 ‘행동을 유도하는 수단’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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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이 작동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응답하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출국과 동시에 자동환전이 이뤄지고, 실시간 세금이 정산되며, 복지금은 AI가 판단한 생활 수준에 따라 알아서 지급된다.

모든 것이 정확하고, 빠르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언제 이 결정에 관여했던가?

판단은 시스템이 대신하며, 인간은 판단 이전의 존재로 물러난다.

사유가 필요 없는 세계, 그것이 AI가 연동된 디지털 화폐의 미래다.

물론 기술은 늘 중립적이다. 그러나 기술이 어디에,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느냐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다. 디지털 화폐가 이상적인 공공재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 설계자와 운영자의 손에 달려 있다. 인공지능이 실시간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공의 이익’을 계산한다면, 우리는 그 공공성의 기준이 누구에 의해 정의되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가장 최적화된 방식이 가장 정의로운 방식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통제가 정당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디지털 화폐가 드러내는 명암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그 반대편, 중앙 없는 화폐를 자처하는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들이 또 다른 권력 구조를 또 다르게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다시 지배하게 되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어떤 통화 구조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묻게 된다.

화폐의 무분별한 디지털화는 우리 삶의 판단 구조를 다시 쓰고 있다. 인공지능과 결합된 이 구조는 인간을 더 계산 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 통제 가능한 흐름으로 정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여전히 계산되지 않는 잉여의 순간에 남아 있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선택하는 느림’이며, 그것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통화 윤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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