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Ⅲ. 넘어져도 다시,
시작의 음 ‘도’
처음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을 때, 나는 ‘도’를 눌렀다.
그 울림은 동시에 내 피아니스트의 꿈이 깨어난 순간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만들어낸 첫소리 속에는
화려한 드레스, 눈부신 무대 조명, 숨죽인 관객들...
어린 내가 마음속에 그리던 모든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 모든 상상을 품고, 나는 다시 ‘도’를 눌렀다.
넘어져도, 시작의 음 ‘도’로.
‘도’는 언제나 내게 시작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잘 안 되고, 실수해도 다시 돌아오게 하는 회복의 음.
“그래, 다시 해보자. 괜찮아.”
단순하지만 햇살처럼 따뜻하고, 뿌리처럼 든든한 음이었다.
일곱 살 겨울, 피아노 학원에서 언니들이 보던 비디오 속 남자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처음 보았다.
땀을 흘리며 건반을 휘몰아치는 그의 모습과 쏟아져 나오는 소리는 내 세계를 흔들었다.
선생님이 다가와 말씀하셨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야.”
나는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라흐마... 니노프?’
“저도 치고 싶어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너한테는 아직 너무 어려워.”
‘라흐마니노프의 나라 러시아’
그 소망은 결국 나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갔다.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 초연으로 혹평을 받았던 도시,
차이코프스키가 공부하고 쇼스타코비치가 교수로 활동한 바로 그곳으로.
유학 초기에 담당 교수님께 용기를 내어 말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히 말씀하셨다.
“아직 이르다.”
그러던 1년 뒤, 박사과정 첫 독주회를 준비하며 나는 브람스 Op.118, N. 2 ‘인터 메죠’의 레가토 선율을 혹독히 훈련받아야 했다.
수업 중 내가 피아노를 칠 때 소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교수님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번졌다.
“그 소리 아니야. 다시 해봐. 손목 힘 빼고, 윗 멜로디가 끊어지지 않게.”
“페달은 여기서 하프 페달만 밟아야 섬세히 연결돼. 다시.”
“너무 감정적으로 연주하는구나. 넌 네가 내는 소리를 진짜로 듣지 못하고 있어. 다시!”
‘아... 떨려. 계속 긴장되네.’
손끝에 땀이 배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상체의 근육은 긴장으로 굳어가고, 숨조차 막혔다.
그때 교수님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씀하셨다.
“넌 소리의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어. 이 곡에서 그걸 배워야 해. 포기하지 마.”
그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순간, 내 귀가 한층 더 예민하게 열리는 느낌이었다.
소리의 결 하나하나를 붙잡기 위해 몸을 기울였고, 내 안에 작은 균열이 생기며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유연하게, 귀를 열고 원하는 소리를 내보자.’
속으로 그렇게 외칠 때,
근육이 부드러워졌고 마침내 내가 원하던 소리가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와, 된다! 이게 되네?’
그때 그 기분이란!
그 혹독한 훈련은 결국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할 내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년 뒤 겨울.
나는 그토록 꿈꾸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습을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라흐마니노프를 마주하던 그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은 유난히 깊고도 매서웠다.
오후 여덟 시.
거리의 전광판에는 ‘–38°C’라는 숫자가 빛났다.
눈보라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쉼 없이 내렸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대신하는 듯했다.
희뿌연 눈에 덮인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세상은 적막했다. 하지만 내 방 안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작은 탁자 위 전등빛이 노랗게 번지며 공기 속에 은근한 온기를 만들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차가운 손끝이 건반을 스치자 마치 얼어붙은 마음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정말 내가 이 곡을 연습하고 있는 거야?”
“이곳이... 라흐마니노프의 땅이구나.”
그건 믿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의 도시, 그의 언어, 그의 공기 속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며칠 뒤, 교수님 댁에서 연습하던 날.
첫 코드가 울리자 나는 연주를 시작했고, 교수님은 옆의 그랜드 피아노에서 오케스트라 파트를 반주해 주셨다.
그때 갑자기 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어둠이 방 안을 삼켰다.
‘어? 너무 어두워.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 벌어졌네?’
나는 놀라 손을 멈추었지만, 교수님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촛불 두 개에 불을 붙이시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반주를 시작하셨다.
‘지금 이 상태에서 계속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나도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은은히 흔들리는 불빛 아래,
창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쳤고 불빛에 부서지는 눈송이들이 반짝였다.
피아노 위로 드리운 촛불의 그림자가 마치 춤을 추듯 흔들렸다.
그날, 나는 참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내 안에서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불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벽에 부딪혔다.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는 마디마다 빽빽하게 들어선 음표들로 가득했다.
그의 음악을 연주할 때 필수 조건은 음 하나하나를 정확히 듣고 손가락의 힘을 정교하게 조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손은 늘 땀에 젖었고,
건반 위에서 미끄러지는 손끝은 실수를 불러왔다.
실수는 긴장을 낳고, 긴장은 더 많은 실수를 불렀다.
굳어가는 근육,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
소리는 둔해지고, 내 귀는 점점 닫혀갔다.
‘아... 역시 안 되는 걸까?
혹시 러시아로 떠난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억눌렀던 눈물이 터졌다.
방 안에 홀로 앉아 꺼이꺼이 울음을 삼켰다.
나의 울음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도’
그 단 하나의 음은 나를 지탱하던 버팀목이었지만,
이제는 내 안의 무거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울음이 되었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릴 때마다 그 ‘도’는 내 좌절이자 내 응어리였다.
‘라흐마니노프가 혹시 이런 마음이었을까?’
울다가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향곡 1번의 실패로 우울증에 빠졌던 그가 다시 일어서서 작곡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모든 것을 잃고도 그는 음악으로 돌아왔다. 세상이 혹평으로 등을 돌려도 그는 건반 앞에 다시 앉았다.
절망 끝에서도 그는 ‘끝’이 아닌 ‘다시’를 택했다.
바로 그때,
조용하고도 명료한 음성이 내 안에 울렸다.
그 소리는 확고한 울림이었다.
“그래, 다시 손을 올리자. 괜찮아.”
눈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던 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건반 위의 ‘도’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그 첫 ‘도’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단단한 소리였다.
그 울림은 내 안 깊숙이 번져 좌절을 지나 회복으로, 고통을 지나 감사로 바꾸어갔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데려가는 예고였다.
그것이 바로 ‘크레셴도’이리라.
넘어져도, 흔들려도,
나는 결국 그 음 앞에 다시 선다.
그 첫 시작 ‘도’.
작고 담담한 그 음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여전히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