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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Feb 26. 2024

피어나는 봄 : 나에게 화려한 세상을 주세요!   

월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목요일 오전에 눈으로 바뀌면서 세상을 순백의 눈꽃 세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변화를 마음껏 감상하며 즐기기보다는 오후에 병원 가는 길이 걱정되었다. ‘몸도 편하지 않은데 도로까지 미끄러우면 어쩌나?’라는 근심이 의욕 상실로까지 이어져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점을 마치고 싸놓은 짐을 아이들이 차로 옮겨 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양가감정이 들었다. 방학 동안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 동시에 다 자란 아이들이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짐을 차에 실어주는 고마운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한 엄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항상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던 나는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곳이 없었다. 가정 내에서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나의 상황은 절망감으로 이어졌다. 힘들고 괴롭고 외로워도 혼자서 눌러야만 했다. 알아달라고 하소연해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 남보다 못한 게 남편이라지만, 갈수록 소통이 어려워졌다.      


필요한 일이나 급한 일이 없는 한 전화 한 통도 없다. 가족 톡방이 우리가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다. 가끔 아이들 문제나 궁금한 일이 있어 전화해도 그것만 이야기한다.      


간혹 어떠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나는 솔직하게 점점 더 힘들다고 말하면 남편은 매일 쉬는데 왜 아프냐?”라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반응한다. 왜 물어보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나 있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공감할 줄 모르고 자신 힘든 것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대화하고 나면 짜증이 더 난다. 이유는 내가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대가 없으니, 남편의 어떤 반응에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간혹 나를 사랑하시나 보다.’ 1시가 넘어 병원으로 향하는 그 순간, 눈은 멈추었고 도로 위의 눈도 녹아있었다. 햇볕이 없어 운전하기가 최상인 날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6개월 만에 본 의사 선생님은 얼굴이 왜 이리 안 좋냐며 남편보다 더 걱정해 주었다. 진맥을 보면서 맥을 찾을 수 없는 내 손목을 누르면 안타까워했다. 나는      


살아 있는 걸로 감사해야지요. 몇몇 병원장님들도 그렇게 말해요. 정말 징하지요?”라고 웃으며 말하자, 선생님도 웃음으로 모든 대답을 하며, “링거 맞으면서 편히 쉬세요!”라는 의례적인 말이 그 순간엔 위안이 되었다.

      

병실로 올라와 짐 정리를 마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인턴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싶어 나의 입장은 말로만 이해한다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몇 분이 길고 부담스러웠다. 그냥 눕고만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청해도 잠들기 힘든 나에게 병실 또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다인실이다. 옆의 주무시는 환자분 숨소리까지 나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 온 귀마개를 최대한 귀에 꽉 쑤셔 넣었다.     




자면서 10번 이상 의식 없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지만, 아침 10시까지 잤다. 오랜만의 긴 수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핸드폰을 보려고 들자, “내 이쁜 딸!”이란 글씨가 상단에 뜨면서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딸은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내 안경이 두 동강이 났어. 지금 안경원에 왔는데 다시 맞춰야 하나 봐? 안경테도 바꿔야 하고?”


어떻게 갔어? 보이지 않았을 텐데? 잘 간 거지?”     


. 근데 왜 전화도 안 받고 톡도 안보고 그래? 나 빵 만들러도 못 갔어.”라며 불안해하던 딸은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힘들었나 봐? 안경 이쁜 걸로 새로 해. 근데 보여? 동생 데리고 와서 고르라고 하지?”  

   

“엄마 아들 자고 있지. 예전 모양이랑 비슷한 걸로 하면 되겠지?”라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하루만 늦게 입원했어도 아침에 딸이 저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라고 도움도 못 주고.    

  



내 몸은 점점 힘들어져 앉아있기도 버거웠다. 점심까지 누워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힘이 나는 거 같아 오랜만에 씻었다. 어제 그제는 씻을 힘도 없었다. 치료를 받고 와서 수분이 필요한 나는 수액에 비타민만 첨가한 약한 농도의 링거를 부탁했다.

     

몸이 약해 이젠 아미노산은 맞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피 검사 결과가 나를 놀라게 했다. 하루에 2끼씩 끼니때마다 고기를 먹었는데도 단백질 부족으로 나왔다. 철분 약과 비타민 한약 등 피에 좋은 약들을 매일 챙겨 먹었는데도 역시나 헤모글로빈이 부족했다.     


결국 병 같지도 않은 병으로 중환자처럼 두 개의 링거를 동시에 맞고 있다. 병원에 이걸 맞으러 온 건데 왜 맞을 때마다 비참한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면 이제는 화려하게 살고 싶다.      


어렸을 때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고 싶은 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겐 선택권도 권리도 없었다. 돈을 벌고부터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끼면 절약하며 나에게 쓰지 못했다. 정말 구두쇠처럼 살았다.     


가장 이뻐야 할 20대에도 이쁘게 살지 못했다. 남들보다 늦은 대학은 학비의 부담과 나의 생활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돈이 있어도 불안해서 못 쓰며 살았다. 이러한 불안감은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나이 많은 직업도 없는 두 남녀가 만나 원장 말에 속아 인수한 학원은 자금압박으로 나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이 아이들에게는 나 같은 삶이나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나에게는 쓰지 못해도 자식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썼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 복은 없어도 남편 복은 받고 싶었다. 가능한 남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고, 남편이 원하면 나는 쓰지 못해도 주었다. 주식 투자로 손실을 보는 남편에게 매번 마지막이라며 준 돈이 끝도 없었다.     


암이 왔어도 남편이 2년 전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아이들과 남편에겐 끊임없이 주었다. 이젠 남편이 힘들어해도 그만 주려고 한다. 그 많은 돈을 가져갔지만, 돈을 벌어도 나에겐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아이들도 대학까지만 주겠다고 했다.     




딸을 보면서 부러울 때가 많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내 딸. 오늘도 네일 아트를 하고 왔다며 자랑하는 이쁜 딸이 부러웠다. 나도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면 이제는 나만을 위해 이쁘고 화려하게 살고 싶다.      


퇴원하고 2주 동안 한 번 외출하면서 멋지고 화사해 보이고 싶었다. 앞으로 얼마나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다. 나에게 10년만 아프지 않고 화려하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이제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불안과 고통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만의 길을 걷기로 한 지금부터 나의 삶을 서서히 만들어 갈 것이다.   

   

화려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넘어 내면의 만족과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여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앞으로 나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의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 보려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선물을 소중히 여기며,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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