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오늘도 나는 불면의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옆에 계시는 노인 부부는 코를 고시며 초 저녁부터 맛있는 잠을 주무시고 계신다. 저분들처럼 나도 행복한 숨결을 내쉬며 깊은 잠을 자고 싶다.
나는 어제오늘 코인으로 2,000만 원이란 수익을 챙긴 기쁨도 이미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깊은 수면으로 들어가고 싶다. 이 순간 나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가지고 주무시는 노부부가 제일 부러 울 따름이다.
주말 동안 링거에 붙들려 꼼짝하지 못한 나는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싶었다. 친구와 통화하다 딸기 이야기가 나오자, 불현듯 딸기도 먹고 싶어졌다. 점심 식사 후, 행복하고 가벼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락시장 쪽으로 옮겨졌다.
며칠 만에 병실 밖으로 나온 나는 맑은 하늘과 따뜻한 봄바람에 흠뻑 젖어 어느새 가락시장 과일 코너까지 왔다. 경기가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넓은 시장 안에 손님은 나와 어떤 남자분 둘밖에 없었다. 무안하고 미안할 정도로 상인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딸기 값이 내렸다는데 1kg 한 팩에 15,000원이란다. 천일 향은 5개 만원이고 사과는 3개 만원이란다. 다 먹지 못할 걸 알면서도 상큼한 딸기와 시큼한 천일 향,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빨간빛의 큼직한 사과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랜만에 과일을 사는 나는 사과 2개를 포함해서 3만 원에 달라고 하자,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주셨다. 가지고 간 시장바구니에 천일 향과 사과를 한쪽 어깨에 메고, 싱싱한 딸기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손에 들었다. 편안한 오후의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병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커피숍의 가격표가 나를 멈춰 세웠다. 2시 이후 아메리카노가 990원이란다. ‘990원? 아니 과일값은 2배 이상 뛰었는데 커피값은 3분의 1 가격으로 내렸네! 저렇게 팔면 손해일 텐데?’라며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진 않지만, 학원에 다니며 로스팅부터 커피에 관한 많은 내용을 배운 적이 있었다. 매일 새로운 커피 맛을 음미하며, 원두의 특성, 볶음 정도와 내리는 방법 등에 따라 맛의 변화를 평가했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다른 카페인과는 다르게 불면을 물론이고, 가슴이 뛰는 이상 반응도 나타났다. 그 이후론 커피를 최대한 자중했지만, 시럽을 듬뿍 넣은 아메리카노나 캐러멜 소스를 넣은 캐러멜 마키아토의 달달함은 언제나 나를 유혹했다.
한 여성분이 열심히 아메리카노를 추출하고 있었다. 앉아계신 손님들 모두가 아메리카노 한잔씩 앞에 놓고 대화 중이었다. 나는 빈자리에 과일을 내려놓고 카페를 둘러보았다. 사업을 했던 나는 처음 가는 영업장소에서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다.
가게 투자 비용 즉, 인테리어와 소품, 주방용품 등을 보면서 빠르게 머리로 손익을 계산해 보았다. 아무리 계산해도 월세며 인건비를 990원으론 감당하기 힘든 구조였다. 미끼상품이라는 건 알지만, 예전같이 사람들의 씀씀이가 넉넉하지 않아서 그런지 미끼상품 외에 다른 음료나 디저트를 추가로 주문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달콤한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시럽을 넣으면서 “990원에 팔면 남는 게 있어요?”라고 물었다. 여자분은 웃으면서
“없지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로스팅부터 커피 내리는 걸 다 배워서 원가를 대강 알거든요. 거기다 인건비와 월세 내면 적자일 거 같은데요?”
“맞아요. 서비스 품목이에요.”라며 웃으셨다.
더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주문이 밀려 그냥 나왔다. 얼마 전, 이 카페처럼 회사 근처에서 브랜드 없는 개인 카페를 하다 그만둔 친구 말이 떠올랐다.
한 집 건너 카페가 있어, 서비스나 가격 경쟁이 힘들었고, 월세와 알바 비 주고 나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돈이 거의 없었단다. 1년간 죽으라 봉사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여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문정동 법조타운에 있는 큰 상가마다 커피숍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특히 스타벅스처럼 대형 프랜차이즈 옆에 있는 개인 커피숍은 타격이 더 클 것이다.
나는 작년 11월 이후, 달달한 커피의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의 먹지 않았던 커피를 990원의 유혹에 빠져 아이스 한잔을 들고 행복에 빠졌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커피인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잠을 자고 싶어서 끊었지만, 시원한 커피가 빨대를 통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와 혀끝의 달달함과 혀 안쪽에서 느끼는 쓴맛의 조화가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것 같았다. 저녁 내내 맛나게 마시며 코인에서 수익까지 챙긴 나는 오랜만에 행복과 황홀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오늘 잠 못 자는 건 아니겠지? 오랜만에 마시는 건데. 내일 한잔 더 먹고 싶은데. 하나님께 기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커피 한 잔의 달콤함과 코인 수익에 행복해하며 잠을 기다렸다. 하지만 커피로 인한 정신적 활기는 소중한 잠을 내쫓아 버렸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불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다. 친구와 카톡하고 새벽 1시에 누웠지만, 2시가 넘은 걸 확인한 후, 잠깐 잠이 들었다. 2시간도 못 자고 좁은 병원 침대에서 몸만 이리저리 뒤척이다 허리 통증으로 일어나고 말았다.
유방암 수술 이후, 나에게 잠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암 환자들은 몸이 차다. 특히 발이 엄청 시리다. 잠을 자고 싶어도 발이 시려 잘 수가 없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자수정 장판도 사고, 수면 양말도 신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터득한 게 따뜻한 장판을 바닥에 까고 무게가 있는 찜질팩을 발 위에 놓는 거였다. 위아래에서 보내주는 열로 발가락이 따뜻함을 느끼면서 스르륵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것도 잠시, 몸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도 기운이 있어야 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잠을 잘 때는 집에서도 병원에서도 깨우지 않는다. 어떤 치료보다 나에겐 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잘 땐 핸드폰도 꺼놓거나 무음으로 해놓는다. 이렇게 소중한 잠 손님은 나를 자주 찾아와 주지 않았다.
잠깐 잠든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3시 반이었다. 누워서 다시 잠을 청했지만, 멀리 떠나버린 잠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쓰고 싶은 글만 이것저것 뒤엉켜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이제 남은 건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뿐이었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잠을 잃어버린 것은 단지 하룻밤의 문제가 아니다. 잠은 우리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고 재생하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건강과 일상의 균형을 위협하는 무서운 고문이라고 생각한다.
잠은 우리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개회를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분들에게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건강한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소중한 삶에 감사하라고 말하고 싶다.
990원의 유혹에 빠진 어리석은 나는 오늘 밤도 내가 좋아하는 돈보다 귀한 잠을 놓치고 말았다.
2024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