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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Dec 22. 2023

다 공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었다. 꽤 오래되었음에도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는 첫 구절은, ‘국민교육헌장’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첫 구절과 함께, 지금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의 한 편을 차지하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이야 당시 주입식 교육의 산물로 모든 애들이 외워야 하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소절은 도대체 왜 기억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교과서에 수록이 되었던가? 어쨌든     

 무수히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을까?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아니고. 세계대전 직후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겠지 라는 생각으로 의문을 덮는다. 그러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의문을 불러온다. 


 자신과 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에게 끌린다는 사람이 있고,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게 끌린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를 테지만, 계절을 만나는 사람의 감정은 반대에 끌릴 것 같다. 겨울엔 따뜻한 걸 찾고, 여름엔 시원한 걸 찾는다는 얘기다.    

 

 날카로운 찬 공기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겨울밤의 따뜻한 이불속은…. 좋다. 행복한 공간이다. 잠들기 전 라부인(죽부인처럼 길게 만든 라텍스 베개)에 다리를 걸치고 뭉근하게 침대를 누를 때의 안락함도 좋고, 잘 자고 깨어난 새벽녘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일어나지 못하게 붙잡는 이불속의 따뜻함과의 티격태격도 좋다. 행복함이 쓰윽 스쳐 지나간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단다. 그래서인가? 여름이 점점 더 극성스러워지는 것 같다. 한낮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밤이 되면 조금은 식어야 하는데 밤에도 뜨겁다. 그런 여름이 길기도 길어서 좀체 물러나질 않는다. 지겹기까지 하다. 그러나 세상에 끝이 없는 게 있겠는가?


 늦여름 해 질 무렵 베란다 창가에 앉아 있노라면 어럽쇼!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얼굴을 간지럽힌다. 이 선선함은 선풍기나 에어컨이 주는 시원함과는 달라서 더위를 식히기엔 살짝은 부족하지만 기분 좋은,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선선함이다. 그리고     


 그 선선함은 곧 눈 시리게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가을을 불러온다. 가을은 마냥 행복한 계절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는 하늘도 좋고, 습기를 전혀 머금지 않았을 듯한 흰 구름이 떠 있는 하늘도 좋다. 이제 수명을 다하여 갈색으로, 또는 노란색으로, 또는 붉은색의 잎이 되어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도 아름답고, 바람에 날리어 산책길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도 좋다. 선선하고 청명한 공기 때문일까? 가을은 명료한 느낌의 계절이다. 반면에     


 봄은 살짝 몽롱한 계절이다. 진달래꽃이 피기도 전에, 베란다에 있는 철쭉이 성급하게 꽃을 피우면 봄이 찾아온 거다.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아지랑이와 몽롱함과 나른함과 아련함과 게으름을 동반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그 몽롱함 속에서 새 삶은 시작된다. 노란 싹들이 고개를 내민다는 거다. 작은 가지 끝에 움트는 싹도 신기하지만, 딱딱한 벚나무의 굵은 몸통을 뚫고 나오는 싹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새 생명을 본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닌가?     


 박노해 시인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 진실로 좋은 것,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라고 했다. 그런 것 같다. 행복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내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아름답거나 흐뭇한 광경을 보는 것, 계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등등 대부분의 행복함은 공짜인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아무 느낌 없는 일상적인 것, 아무렇지 않은 가족, 대수로운 것 없는 먹거리,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시간과 함께하는, 그냥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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