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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un 04. 2023

등나무 꽃 피는 계절이 오면 나는 온순해진다

일 년 중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왔다.


우리나라 기후가 늘 5~6월만 같았어도 오래전에 이미 선진국에 진입하고도 남았을 텐데. 사계절이 뚜렸하다곤 하지만 우리나라 계절은 혹독한 편이다. 내가 사는 곳만 해도 봄·가을 똥바람하며, 중위도에서 보기 힘든 매서운 겨울 추위는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기에 대단히 마이너스적이다. 올리브 나무가 소나무처럼 채이는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지중해성 기후가 이 땅에도 적용됐다면 파스타는 물론이고, 에스프레소도 우리나라가 더 기가 막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성품도 더 여유롭고 낙천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쟁사야 동양이나 서양이나 피비린내비슷하니까 나는 사람들의 기질적 요인에 기후나 풍토를 더 얹는 편이다. 이 계절엔 나도 더 온순해지는 걸.


대학 다닐 때 느지막이 자취방을 기어 나오면 오후 햇살이 여전히 쨍쨍했다. 나는 측문을 따라 교정을 가로질러 학교 구내식당에 들어가 저녁밥을 먹었다. 식판에 담긴 밥과 반찬을 해치우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아마 이때쯤 해서는 해가 뉘엿뉘엿으로 바뀌는데 나는 어느 날 내가 앉던 벤치 위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스민 것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머리 위로 등나무 줄기들이 타고 올라가 그 얽힌 가지마다 등꽃들을 수없이 매달고 있었다. 가끔 바람에 등꽃들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그때는 정말 낙화축제의 낙화 불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마 하루 중 때가 담배 맛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지금은 정확히 묘사할 수 없지만 난 등나무 향기도 뚜렷이 기억한다. 언젠가 등나무꽃 향기를 꼭 닮은 껌을 씹은 적이 있는데 자일리톨 레인보우 맛이라 정확히 어떤 색 껌에서 그 향기가 묻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은은하니 풍기던 그 껌에서 나는 잠시 그 등나무 아래에 다녀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연애나 사랑에 대해서 만큼은 혹독할 만큼 서툴고 자학적인 시기였다. 거칠고 찌질하며 쓰린 기억들의 연속이다. 한 번은 사랑 따윈 지랄 같은 거라고 속으로 울부짖으며 미친 듯 한낮의 뜨거운 인도길을 걷기도 했는데 나는 뭐가 그리 심술궂게 보였던지 마침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어느 아저씨의 면상에 주먹을 날릴 뻔했다. 지금 생각해도 섬뜩한 공격성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밉고 싫었다. 그날은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던 그 애가 나란히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종달새처럼 길 건너편으로 날아가버린 날이었다. 휴강을 속이고 일부러 그 애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우연인 듯 멋진 시간을 보내려 계획했었는 길 건너로  날아간 나의 피앙새'착'하고 모르는 남자의 팔짱을 꼈을 때 무너지던 내 마음이 생각난다. 나는 혼자 교정의 잔디 위에서 소주를 마셨고, 그래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토하고자 내 계획을 알고 있었던 친구집을 향해 미친 듯이 걷던 중이었다. 아직도 그 한낮의 내 거친 숨소리와 붉어진 두 눈과 증오에 찬 욕지거리들이 생생하다. 그런 시절이 었는데도 나는  등나무 아래만 생각하면 돌연 마음이 달래진다.


왜 그랬을까.

그땐 그멋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시절 난 머리마저 뭔가에 바짝 곤두서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에 하드젤을 잔뜩 펴 바르고 그야말로 고슴도치처럼 머리칼을 바짝 세워 드라이로 말려냈다. 거기에 스프레이를 한껏 분사하면 정말 누구 말대로 풍선이라도 닿으면 '팡'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난 습관처럼 바짝 곤두선 머리칼의 날카로움을 손바닥 가득 확인하고서 비로소 스스로 안심하곤 했다. 행여 비라도 내려 머리 세팅이 흐물흐물해지면 나도 흐물흐물해졌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이었다. 군대 가기 바로 직전엔 담배도 말보로 미디엄에서 레드로 바뀠다. 이맘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독하고 지독한 시기였다. 말보로 레드로 말할 것 같으면 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첫 모금부터 뻑뻑하고 묵직한 타격감이 전해다. 그 연기가 기도를 타고 폐에 도달하는 첫 순간에는 모든 폐포꽈리들이 '꽤엑'하고 소리를 지를 만큼 독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어느 시기에 그렇게 독한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피웠다는 사실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게 다 그 애 때문이었을까. 여자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아프고 독하고 깡마르고 비틀대던 시기를 살았던 걸까. 그래, 그렇다. 그땐 그게 다였으니까.


내 세계의 과거로 편지를 보낸다면 두 사람의 수신자가 떠오른다. 한 명은 남자고, 한 명은 여자다. 둘 다 이제는 사는 곳도 몰라서, 주소도 없이 그들이 내 편지를 받아보길 원한다면 난 브런치에 이 편질 띄워야 할 판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한 놈은 그렇게 친했으면서 이십 년 가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모르고, 한 사람에겐 이십 년이 다 돼서야 뜬금없이 그 시절의 짝사랑을 고백할 참이라 나도 이게 무슨 심보인가 싶다. 물론 그 글이 포털의 메인에 올라갈 확률이나, 또 타이밍 맞게  그 편질 두 사람이 보게 될 확률도 희박하. 하지만 읽기만 한다면 그 둘은 내가 쓴 편지라는 걸 대번에 알아볼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야기는 특별했으니까. 내가 증명하고, 그 둘이 증명해 줄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 그러나 어긋난 것들, 그렇게 독하게 좋아했으면서도 섹스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키치한 시절, 인생을 통틀어 한 사람을 그렇게 좋아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과 그 주인공이 자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서사를 증명해줄  친구, 그 외 영화나 당구, 스타크래프트, 만화책, 오토바이, 아르바이트.... '정말 밥은 먹고 다녔냐' 싶을  시절들, 돌아가고 싶진 않아도 차마 잊을 수도 없는  경계를 더듬어 시절의 증언자로서 이젠 곤 떠올릴 사람도 없다. 그 둘도 가끔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글을 본다면 그건 왠지 그들에게도 꽤 근사한 위로가 될 것 같다. 요즘 등나무가 얽히는 계절에 나는 가끔 그런 것들생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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