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멀쩡하던 담벼락이 쓰러지듯 진실이 덮쳐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 담벼락 위에 놓여있던 아이스 버킷의 얼음물이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고 해야 하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잠시 띵했다. 살아오면서 의식적 고상함에 가까운 '진실'같은 단어는 입에 올려 본 적이 없다. 그런 건 어디까지나 문학인이나 사회운동가의 입에서나 뱉어질 말이지 평소 저속과 비속에 가까운 내 말뽄새를 볼 때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단어였다. 그런 걸 입에 올릴 만큼 내가 진지하거나 비판에 찬 순간이 있었던가. 그런데 이번만큼은 좀 다르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3.1 만세운동에 나가셨다가 가슴에 총탄을 맞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 동네가 전혀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심심치 않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구석이 있어 나도 가끔 놀란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언제 적 얘기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내가 대학 때쯤 아버지께 들었으니까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다. 처음 내가 보인 반응은 '아니 우리가 독립유공자의 집안이라고요?' 였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잠시 고양되긴 했지만 난 곧 심드렁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그냥 구전에서 시작해서 구전으로 끝나는 싱거운 결말 아닌가. 이야기가 꾸며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할아버지 가슴의 흉터자국과 그것이 관통하여 등에도 똑같은 흉터자국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처가 매년 찬바람이 불어오는 10월경쯤 되면 이상하게 들쑤셔서 그럴 때마다 납작 돌이나 기왓장을 화롯불에 달궈 가슴팍을 지지셨다는 것,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적삼이 다 젖도록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기도 하셨다는 것. 이 모든 구전은 분명 진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구전에서만 머물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검토 서류로 책상 위에 반듯이 올려져 냉철하게 검증됨으로써 비로소 진실로서의 지위를 갖출 어떤 절차가 진행되지는 못한 것이다. '유공자 신청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라고 물었지만, 난 이내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신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그런 할아버지를 두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자신은 그 행적에 대해 무엇을 보태거나 하지 못했다는 것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었다. 약간의 푸념과 항변 같은 것들이 곁들여져 다음 세대로의 구전이 이제 막 나에게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흘려들었다. 그래서 뭐. 난 또 뭐라고, 이제 와서 그런 얘길 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냥 알아나 두라고 던지시는 건가요. 유공자 신청을 하려면 벌써 했어야지. 나도 혜택 좀 받게. 이런 건 대충 입으로 때워서 될 일이 아니다. 뭘로 증명할 건데. 우리 집안은 그 흔한 족보도 잃어버린, 기록 관리 같은 건 영 젬병인 집안 아닌가. 집안의 장손이란 큰(댁) 형도 제삿날 술이나 쳐드실 줄 알았지 평소엔 처맞을 일만 골라서하는 집안의 탕아였다.그러니 변변찮은 인물들 중에 누가 그런 수고를 감내하겠나. 동네에 몇 안 계시던 할아버지 동무들도 이젠 다 떠나시고 그 시절을 증언해 줄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당시 대학물을 퍼먹고 있다 한들 이런 건 대학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 감당하기에, 혹은 어떤 의무감을 갖기에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천이십삼 년이 다 되가는 어느 날, 갑자기 또 튀어나온다고?
"여기 잠시 차 좀 대 보렴. 뭐 좀 확인할 게 있어"
"여기요?"
아버지는 병원으로 가는 고갯길을 앞두고 문득 생각이 난 듯 잠시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난 백미러를 살피며 조심스레 속도를 줄였다. '여긴 3.1 만세고개인데......'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유적기념비 앞으로 다가가시더니 거기 적힌 한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기 아버지 성함이 있다던데.....'
"에? 여기 할아버지 성함이 있다고요? 아닌게 아니라 여긴 나도 좀 아는 곳이다. 해마다 기관장님들 모시고 3.1절 기념식을 치르던 곳이었으니까.
"어이쿠. 여기 있네. ***"
아버지는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로 한 이름을 불러냈다. '***, 이게 네 할아버지 이름이야'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엥, 뭐라고요? ***이 할아버지 성함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난 여태 할아버지 성함도 몰랐구나. '아니 근데 그럼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때 가문의 구전으로나 흘러오던 할아버지 만세 운동사가 공식기록으로 확인됐다는 건데'. 난 갑자기 어이가 없어졌다. 기념비엔 1919년 4. 9일 이 지역 궐기대회의 간략한 소개와 함께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발생한 사망자와 부상자 명단이 쭈욱 쓰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000里 ***' 가 세로로 적혀 있었다. 맙소사!
"제가 좀 알아볼게요, 아버지"
나는 일단 아버지와 다시 차에 올랐다. 매미가 요란하게 울던 정오였다.
지하에 계신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런 시그널을 보내오신 걸까. 이 유적공원은 해마다 5월쯤 풀깎이 작업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올해 거기 공공근로하시던 작업자 한분이 우리 동네 아저씨였나 보다. '아재요. 기사문 공원에 그 댁 할아버지 성함이 있더만' 아버지는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셨다만 오늘 병원 가는 길에 마침 그 일이 생각나서 둘러보다 유레카가 터진 것이다. 사무실에 돌아와 몇 군데 전화 좀 돌려보고, 일러주는 대로 기록을 좀 추적하였더니 지역 문화원 소장 3.1 만세운동사에 떡하니 할아버지 인물 편이 실려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
00군 00면 사람이다.
00면에서는 1919년 4월 7일과 9일에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7일의 운동은 9일로 계획되어 있던 00면 전체의 만세운동이 미리 발각됨에 따라 ~ (중략) ~ 면사무소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은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고 ~ (중략) ~ 이때 미리 와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일군과 경찰이 발포하여 9명이 사망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도 이때 부상당하여 고통을 치르었다
당시 아버지 증언을 조금 더 보태자면 여기 주민들이 여럿 봉기하여 일본 주재소 앞으로 몰려가 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는데 갑자기 군경이 쏜 총탄에 관통상을 입으시고, 구사일생으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집에 돌아오신 후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며칠을 부엌 땔감 검불더미에 숨어 지내셨단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이 일에 대해 별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그것은 이 일로 동네에서 죽은 사람도 많거니와 다친 사람은 물론, 수형 되신 분들도 많았기 때문이란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고 한다.
쿤데라의 소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나는 이 우연한 사건이 지하세계로부터 올라온 일종의 고매하고 단단한 마에스트로의 지휘봉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휘저어지며 아버지와 나를 새로운 챕터의 악보로 인도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의지와 의무감은 물론, 또 약간의 호기심과 함께 이런 저런 자료들을 취합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 전화로 보고드렸으며, 그때마다 아버지는 뭔가 크게 안심하시는 듯 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