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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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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Feb 02. 2024

20대의 조건으로 20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정확히는 2023년 12월 중순쯤 느낀 것이지만, H는 2023년과, 그리고 이어지는 2024년이 자기 직장생활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으로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 그것은 시간의 연속성 위에서 느끼는 어떤 인지로, 미래의 회고시점이 아닌 둥둥 떠가는 시간의 물결 위에서 느끼는 실시간적 전환감각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다가왔기에 H는 다가올 2024년의 시간들, 인연들, 업무들을 좀 더 소중히 다루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갖는 것부터가 괜한 머피의 법칙을 불러일으킬 네거티브한 염려도 있었지만, 가령 인생에 시절인연이나 호우시절 같은 낭만적인 것들이 남았다면 그런 것들을 빚어볼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H로서는 하루하루의 단추들을 잘 꾀어야겠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들었다.


잠시 H의 근황을 소개하자면, 2023년 초에 H는 조직으로 파견근무를 나왔었다. 새로운 조직과 직책에 적응하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일과 사람들 모두 만족스러운 1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본청 복귀를 앞둔 12월 즈음 H는 장기교육 선발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게 된 사실을 알았다. 장기교육은 일종의 안식년 같은 개념으로 직장을 떠나 직무 외 다양한 취미, 교양 등을 함께 익힐 수 있는 약 10개월 여간의 교육코스다. 잠시 여유를 찾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기에 은근 경쟁이 치열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예상치 못한 파견생활과 또 연이어 이어지는 장기교육의 행운이 H로서는 퍽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2023년과 2024년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근 20여 년을 한 길로만 달려온 H에게 잠시 오솔길을 허락한 신의 가호 같았다. 


H를 무엇보다 설레게 만든 건 자취생활이었다. 교육원은 H가 대학을 나왔던 춘천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거기는 10여 년의 자취생활이 때 묻은 곳이기도 하. 20대의 청춘과 우수와 추억들이 묻힌 곳, 자주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추억이란 이름의 스카프를 두르고 하염없이 과거로 걸어 들어가는 , 실제로 언젠가 한 번은 무작정 차를 몰고 도착해 공지천 호수를 바라보며 그냥 담배 두어 대를 피고 돌아온 적도 있다. 물론 거기서 뭔가를 건져올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H가 사랑하는 것들은 분명 현재에 다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끔 사무치는 날엔 H는 마땅히 도망칠 곳이 없어 거기로 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물론 중년이 다 된 나이에 홀로 밥하고 빨래하고 독거의 고독을 씹을 것을 생각하니 잠시 아찔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묘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그야말로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독립생활에 대한 은근한 로망을 품고 있었단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을 식구들 앞에서 넋두리가 아닌 공식발표로 선언했을 때, 흔들렸던 건 오히려 H의 눈동자였다. 아내는 '빨리 가버려!' 하고 분리수거물을 버리듯 임팩트 있게 받아쳤다.


H는 오래전부터 20대의 조건으로 20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고 생각하여 왔다. 20대를 생각하면 그냥 뙤약 같은 젊음을 마냥 걷기만 했던 것 같다. H에게 20대는 대학 2학년 1학기까지가 전체 지분의 8할 정도를 차지한다. 고교 3년간의 입시에서 벗어나 갑자기 찾아든 캠퍼스의 낭만에 무장해제된 시기였다. 일단은 놀고 보자는 생각이 팽배했다. 먹고 마시고 치근댔다. 누구는 저돌적으로, 누구는 암시와 제스처로, 캠퍼스엔 영산홍 같은 추파들이 난무했다. 그런 요란함들이 반학기 정도가 지나자 서서히 진정됐다. 같은 과 동기끼리 주고받던 자급자족적 구애들은 대부분 동아리 활동으로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몇몇은 굳이 학과에 목을 매었는데 H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여자애들이 떠난 자리엔 수컷들만 남아 학과 사무실엔 쉰내가 진동했다. 주머니에 돈은 없고, 우유갑을 접어 족구나 해대는 무의미한 방탕과 허세로 시간을 탕진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제일 꺼칠했던 시기야. 각질 알지? 다리나 팔에 허옇게 달라붙어 긁으면 확 일어나는 피부 껍질들. 그야말로 기름기라곤 없는 깡마른 몸과 마음을 지닌 시기였어. 한 번은 기숙사 룸메이트형이 '군대 갔다 오면 굉장히 좋아질 얼굴이다.' 라고 말했지. 자신감이랄 게 없었어. 도대체 생활에 에센스란게 없었지. 그냥 메마르고 황량하기만 했어. 좋아한 애가 있었으면서도 대시 한번 못한 이유가 그거 때문인 것 같아. 결과적으로 그 우울때문에 내 이십대는 나한테도 사랑받지 못했던 것 같아.


H에게 이십 대는 그냥 이십 대의 이름으로만 남았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은 여자애처럼. H는 얼굴보다 그 이름으로만 이십 대를 사랑하기로 오래전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흔 넘은 나이에 그 시절을 다시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H는 궁금했다. 원래는 30대의 조건으로 20대로 돌아가고픈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40대에는 어떨까. 왠지 그리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


물론 여자앤 이젠 거기 없겠지. 하지만 난 그 애 때문에 놓쳤던 다른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랜만에 학식도 먹어보고, 주말엔 중앙도서관에 가 책 냄새를 맡으며 글도 좀 써봐야지. 나른한 햇살에 잠시 졸다 싸구려 자판기 커피도 뽑아봐야겠다. 그 옛날 공무원 시험 준비하며 새벽에 운동했던 호반체육관 지하 헬스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거기 센터 수영장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으려나. 




H는 서둘러 월세방 하나를 계약했다. 직방앱에서 두어 개를 찜해놓고 눈팅을 하다 그중 하나를 냉큼 골라잡았다. 보증금 300에 월 33만 원 정도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H는 생각했다. 20대라면 언간생심 며칠을 발품 팔고 며칠을 고민했을 일이다. 2024년 1월 9일 계약서를 쓰는 날, 춘천엔 눈이 몹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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