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가 춘천에 올라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소였다. H는 떠나오기 전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는데 왜 그렇게 목욕재계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룸방도 다시 한번 꼼꼼히 쓸고 닦았다. 그리곤 이런저런 살림 도구들을 사러 대형마트에 갔다. 냄비 하나를 고르자 냄비 받침대가 생각났다. 그러자 떠먹을 젓가락과 숟가락, 그릇들이 연이어 생각났고, 뒤를 이어 컵과 가위, 칼과 도마, 쟁반들이 따라왔다. 욕실 청소용 솔을 하나 골랐는데 청소용 왁스가 필요했고, 슬리퍼와 수건, 화장지, 비누, 샴푸 따위가 생각났다. 거기에 옷걸이, 쓰레기통, 청소용 찍찍이, 트레이, 방향제도 하나, 세제(참! 세제는 드럼용으로 사야 하고) 싱크볼에 약간 녹이 났던데 그건 뭘로 지우더라.....
당장 필요한 몇 가지만 사려 나선 길인데 그건 큰 오산이었다. 쇼핑카트가 금세 가득 찼다. 그냥 똥이나 좀 닦고 샤워할 몇 가지 용품, 그리고 일용할 라면 정도나 사러 나왔는데 H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식품류는 고르지도 않았다. '이봐 친구, 일단 며칠은 그냥 사 먹기로 하고 이쯤에서 패스하자고' H는 재빨리 내면과 타협했다. 카트를 끌고 매대 위에 물건을 올려놓았더니 28만 몇천 원이 두드려졌다. 뒤에 있던 아줌마가 '어머'하신다. 어쩐지 무안해져 서둘러 물건들을 주워 담는데 점원은 세제가 원플러스원이라고 했다. 또 냄비는 견본품이니 다시 가서 아래칸의 박스 포장된 진짜 상품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괜히 땀이 삐질삐질 났다. H는 시선을 끄는데 익숙지 않다. 가뜩이나 잡다한 살림 도구들을 정신없이 펼쳐 놓고 연신 바코드가 삑삑 대고 있는데 아직도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니. 뭐야 저 아저씨! 요즘 유행하는 '니 혼자 산다' 뭐 그런 거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듯했다. H는 '냄비랑 세제는 빼주세요' 하곤 서둘러 매장을 빠져나왔다. '휴~~,' 대충 트렁크에 물건들을 옮겨 담고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그래 지금은 차라도 있지. 그땐 살림도구들을 죄다 손으로 날랐잖아. 그땐 친구들이 마차노릇을 했지. 어쩌다 자취방이 이사라도 하면 행거며 부르스타며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그냥 친구 서너 명이 머리에 이고 어깨에 걸치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몇 번씩 왕복했다. 그야말로 품앗이였다. 그래도 주인이라고 친구들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 그 무거운 데스크톱은 내가 낑낑대고 날랐지. 윈도우 98 모니터는 족히 20kg는 나갔을 걸.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우리 딸내미 대학 가서 자취하면 자신이 대충 날라는 주겠지만 그래도 몇몇 가지 것들은 제가 직접 나르고 옮겨야 할 텐데..... H는 벌써부터 짠해지기 시작했다.
첫날 자는 밤은 기분이 이상했다. 주문한 매트가 배송되지 않아 요하나 깔고 누우니 바닥이 그리 불편할 수 없다. 수형자처럼 온몸이 다 배겼다. 불 꺼진 방안엔 싸구려 라벤더 향기와 보일러 도는 소리만 요란했다. 저놈의 방향제는 내일 당장 갖다 버려야지.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나 방음이 안되나 싶었는데 어디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듯도 했다. 아니면 또 보일러 소린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사람 코 고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는 거지. 드럼 세탁기가 원래 코 고는 소리가 났던가. H는 집에서 사용하던 드럼 세탁기를 떠올려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텅텅하고 모터도는 소리는 났어도 저렇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는 없었는데. 아니면 물이 차고 빠지는 소리인가. 그런 생각에 골똘하다 보니 이게 다 뭐 하는 상황인가 싶었다. 잠은 안 오고, 어디선가 정체 모를 코 고는 소리는 들려오고. 그러고 보니 낯선 도시에, 격자로 건설된 택지의 한 원룸방에, 대여섯 평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누웠을 여러 타인들이 상상되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점은 모두 다 곤히 잠들고 있을 이 시간에 도시의 한 신입생은 낯선 고독과 씨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H는 결혼하고 나선 단 한 번도 외롭단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오늘 밤은 갑자기 모든 것이 서글퍼졌다. 이게 다 세탁기 때문이야. 나도 며칠 더 지나면 저 세탁기처럼 아무 일 없이 코를 골 수 있겠지. 그나저나 벌써부터 이러면 남은 1년여를 잘 버틸 수 있을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혼자생활인데 갑자기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H는 믿어지지 않았다. 새삼 집과 식구들이 그리워졌다. 그 공기와 가벼운 농담들과 따뜻한 음식과 TV소리들이 사무쳤다. 아내와 나누던 아늑한 침대 위의 에로틱한 애무들도 생각났다. 혼자가 되면 원래 이런 걸까. 한창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을 땐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아침마다 스마일, 스마일 하고 이상한 출근 인사를 배워와서 자기야말로 열린 리더십이라고 우쭐대던 그 과장도 웃긴 짬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속마음을 감추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 지위나 직급보다는 사랑하는 연인의 펠라치오가 훨씬 더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신은 아마 그런 건 모를걸. 그런데 오늘 밤은 그런 것들이 모두 떠나버린 것만 같았다. 다 옛말이 되고 어쩌면 자신도 그때 그 과장처럼 이상한 스마일을 찾으러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건 아닌가 갑자기 겁이 났다. H는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