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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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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Mar 11. 2024

골든타임은 본인이 판단하지 못한다

뭔가 심상치 않았. 겉은 멀쩡했지만 내과적으로, 혹은 심뇌혈관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위험 경고가 울렸다. 잠깐이지만 이렇게 죽는 건가도 싶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의식이 어지럽고, 호흡이 쿵쾅거렸.


그날 H는  아침을 먹고 1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후 피트니스센터에 하체운동을 하러 다. 춘천에 올라와서 이런저런 짐정리를 하느라 다소 어수선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갔고, 요 며칠 시작한 웨이트 훈련도 서서히 본궤도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본격적인 100킬로 스콰트의 첫 문을 두드린 날이었는데 사실 조금 서두른 감도 없진 않다.(한 주정도 더 적응기간을 갖는 것이 현명했을지도.) 알다시피 H는 그간 아파트 헬스장에서 훈련하느라 프리스쾃을 2년 넘게 접해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일일권을 끊는 체육관은 프리존과 머신존을 따로 구분지은 체계 잡힌 정식 피트니스짐었다. H는 하루라도 빨리 제 무게의 스쾃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야 새 거처의 모든 것 성에 차고 안심도 될 것 같았다. 낯선 곳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증명서로 H는 그런 루틴들이 필요했다. 그것은 꼭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내면과의 대화에서 그런 것들로 자신과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그날 스쾃은 상당히 무겁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수행 퍼포먼스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머신 스쾃때문에 잡지 못했던 좌우 밸런스도 며칠만 노력하면 금방 제자리를 찾을 듯싶었다. 한바탕 운동이 끝나샤워까지 마치고 나오자  H는 날아갈 상쾌했다. '좋았어! 이제 완벽해.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히 장을 봐야지.' 오늘 저녁은 풍부한 단백질 식단을 만들어 볼 요량이다. 체육관 근처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예전 대학시절 다니던 대형마트가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오늘은 거길 가봐야겠어'


이렇게나 컸었나. 마트 주차장부터 낯이 익은 게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같은 자취생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중고 마티즈를 끌고 장을 보러 왔던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몰려왔다. 빠져나가는 길의 언덕 코스도 그대로였다. 그땐 스틱기어라 언덕 경사에서 꽤 애를 먹었는데.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흡족한 마음이 더 커졌다. 의류부터 생활용품까지 빠짐없이 골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입구에서부터 모자도 하나 득템하고, 양말도 몇 개 골랐다. 식자재 코너에 들어섰을 땐 시간이 꽤 지체되어 있었다. '서두르자, 우선 김부터 하나 사고, 그다음에 초밥을 보러 가야지' 사실 며칠 전부터 초밥이 먹고 싶었는데 그놈의 최소주문 때문에 배달을 미루고 있던 참이다. 상하기 쉬운 음식은 2인분 배달보단 이렇게 필요한 만큼 량을 마트에서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생선 비린내를 맡아서 그런가 H는 초밥을 고르다 말고 살살 배가 아프다는 생각을 했다. '난 왜 이리 쇼핑센터에만 오면 똥이 마려울까'  만약 아내가 있었다'놈의 장트러블'이라  한 소리했을 것이. 팔천 얼마짜리 초밥세트 하나를 고르고 서둘러 쇼핑을 마치기로 했다. 컵밥 매대를 지나며 화장실이 어디쯤인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때 갑자기 앞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카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쓰러졌을까. 아니다. 그 정돈 아니었다. 물론 카트가 있어 다행이긴 했다. H는 카트에 온몸을 기대고 상황집중했다. '왜 이러지. 이건 작년 12월 아파트 헬스장에서도 잠깐 나타났던 그 증상인데. 그땐 트레이드밀을 걷다 잠깐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 휘청하고 어지러웠다. 다행히  괜찮아졌기에 그간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두 번째 이러니 H는 더럭 겁이 났다. 어! 어어  


정확히 말하면 저린 게 아니라 다리가 마비된 느낌이었다. 오른쪽 오금 뒤쪽이 완전히 힘이 빠진 게 마치 다리가 달랑달랑하다고 느껴졌다. 소름이 쫙 돋았다. 겁을 먹으니 정신이 아득해지고 호흡도 마구 쿵쾅거렸다. 난 이대로 쓰러지는 건가. '이봐! 정신 차리라고.' H는 온 정신을 가다듬었다. 평온한 마트 안에서 H는 혼자서 필사적이 됐다. 머릿속이 이렇게 필사적인데 주위엔 온통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찔했다. 어떡하지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쳐야 하나. 아! 그러기엔 내가 지금 똥이 마려운데. 실려가다 정신을 잃고 바지에 지리고 싶진 않아.'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일단, 괜찮아질 거야, 침착하자' H는 호흡에 집중했다. 조금씩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다리엔 여전히 힘이 없긴 해도 카트를 밀고 보행할 만했다. 정말 웃긴 일이긴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H는 자신이 아무 일 없는 척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 위급함을 감가하려는 이상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쪽팔려서? 만약 그게 골든타임을 놓치게 하는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더라면 어쩌려고 그래.


어찌어찌 H는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운전하고 돌아오자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침대드러누워 폭풍검색을 했다. 뇌경색. 뇌졸중 전조라는 것이 제일 많이 검색됐다.

이런 씨발!

갑자기 한고비 넘긴 게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제일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왜냐면 H는 지금 그야말로 혼자가 아닌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새도 없이 골로 갈 수 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소리하나 낼 수도 없이 서서히 의식을 잃어가는 자신이 상상됐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H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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