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오이 Apr 22. 2024

자취하면서 아직 라면을 먹지 않았습니다

'혼자 사는 남자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지. 왠지 끼니도 잘 챙기지 못할 것 같고, 빨래도 대충 하고, 정리정돈이나 청소가 불결할 것 같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이런 살림살이들에 대해서는 대개 서툰 편이 맞긴 하지. 나도 동의해. 더구나 기혼남이 잠시 '홀아비 생활을 한다'라고 하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H의 자취생활에도 물론 이런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H에게는 그런 것들을 보란 듯이 반전시켜 보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기 좋게 깨부숨으로써 '나 이런 몸이거든' 하 뽐내고 싶었다. 그것은 왠지 엄청난 정서적 쾌감을 선사해 줄 것 같았다. 그간 H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훌륭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인정받아왔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는 늘 삼시 세 끼를 건사받아야 하는 꾸러기 신세였다.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는 아내의 단골 잔소리다. H는 인터넷 쇼핑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챙겨 입는 옷들도 대개 아내가 주문해 주는 편이었다. 어디 놀러 갈 때도 H는 일정을 주도하기보단 운전대를 휘어잡았. 그게 편했다. 잘하는 건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고, 취향도 각자의 방향대로 뻗어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집안 일이 아내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사실 집에만 오면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 어느 순간이 되자 아이의 입에서도 '아빤 뭐 하는 사람이야' 같은 비슷한 잔소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H는 무언가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뭐든 바로 잡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H도 사실 궁금했다. 이 사태가 스스로 자초한 결과인지 아니면 정말 아내의 조력 없인 하루도 살 수 없는 삼식이 새끼인지. 그럴 리 없다면서도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뭐든 만성이 될 것 같았다. 그런 건 위험하다.


때론 노력이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때 있다. 약간의 변화만 주어지면 되는데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란 소리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H에게는 그런 불만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독립생활은 일상의 중심을 다시 자신에게로 맞추는 일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우아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뭘 그런 것까지'라고  수도 있겠지만 속 좁은 H에게 이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춘천에 올라와서 이런저런 자취 도구들을 서둘러 마련하고 학업과 운동, 식단 등에 서둘러 루틴화를 시도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H는 우연찮게 굴러혼삶이 자칫 궁상이나 외로움, 비루함같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것은 모양 빠지는 일이다. 마침 '나 혼자 산다'대니구 편은 많은 동기부여가 됐다. 그의 혼삶 루틴들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렛츠 두잇 빨래타임! 이나 알러빗 샌드위치! , 댓츠라잇! 같은 혼잣말들은 '뭐야 저 자식' 하고 피식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본질이 뮤지션이고, 아트로 꽉 차 있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혼자 생활을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은 없지만 H가 바라는 혼삶도 약간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됐다. H는 누구보다 단단한 에고를 원한다. 반백살 가까이 살았으니 이제는 세상의 알고리즘에 그만 흔들리고 싶다. 남은 삶은 자기 철학대로 온전하게 시간을 굴리고 싶었다. 그런 건 혼자가 돼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혼자가 돼 봐야 짚어볼 수 있고. 혼자가 돼 봐야 단련될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약간의 강박이 있었나 보다. 대니구처럼 빨리빨리를 흉내 내다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몸에 이상 증상이 온 것이다. 일부 마비 증상과 어지러움으로 H는 대학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H는 거의 신경쇠약증 환자같았다. 핼쑥해진 탓에 교육생 중 하나가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  까지 했다. 일주일 뒤 의사 앞에 다시 앉았을 때 H는 MRI상으로 이상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염증 수치도 없나요?'라고 물으니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처방전을 줬는데 약국에 가서 확인해 니 항불안증 약이 섞여 있었다. '뭐야, 그럼 내가 공황인가, 공황으로 마비증상이 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도 약을 받아먹자 증상이 호전됐다. H는 그제야 자신이 혼자생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구나 싶었다.

 

일정이 빠듯해 눈이 펑펑 오는 날 급하게 춘천에 올라와 방을 계약했다. 썩 마음에 내키는 방은 아니었다. 이것저것 쇼핑할 것들이 많아서 그간 익숙지 않았던 인터넷 쇼핑에 카드며 계정들을 연결할 땐 하마터면 핸드폰을 던져버릴 뻔했다. 끼니는 또 왜 그렇게 꼬박꼬박 다가오는지. 괜히 근손실 올까 봐 대충 먹을 순 없었다. 식단 고민을 제일 많이 한 것 같다. 밖에 나가 사 먹으려고 해도 근처엔 죄다 고깃집들이고, 어째 흔한 국밥집·백반집 하나가 없었다. 가성비와 영양을 고려해 오트밀 아침과 닭가슴살, 피넛버터, 단백질 보충제, 그리고 근처 대학의 학식으로 식단을 짰다. 사람 드글드글한 피트니스 센터는 또 어떤가. 늘 한두 명이서 호젓하게 운동하던 아파트 헬스장과는 사뭇 달랐다. 운동은 그렇다 쳐도 땀냄새 가득한 샤워장에는 칠십 대부터 이십 대까지 서로 부대껴가며 거품칠을 했다. 습기 가득한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입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취방 화장실은 특히 더 좁아서 물이 튀지 않게 조곤조곤 샤워하던 게 생각난다. 벽이나 문짝에 곰팡이가 필까봐, 그래서 괜히 나중에 집주인에게 트집 잡히기 싫었다. 그러다 보니 어째 어깨 한번 활짝 펴지 못한 것 같다. 낯선 동료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얼굴을 익히고, 강의를 듣고, 중간중간 워크숍도 가고, 영어시간엔 뭘 물어볼까 가슴도 졸여가며.... 참 신경쓸 일들이 많았다. 알게 모르게  지쳤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다니. 아내 말대로 주는 밥 따스하게 퍼먹다 괜히 밖에 나와 개고생 하는 건가. 그래도 나 아직 라면은 끓이지 않았는데..... 이번 주는 집에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 한 템포 쉬어가자구, 친구.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