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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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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Mar 21. 2024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요즘 들어 난 팔자나 운명 같은 것들이 정말 있다고 믿어.'


그런 것들이 있어서 삶의 어떤 부분들은 끊임없이 그 결말을 향해 달려왔다는 생각. 그런 걸 어떻게 아냐구. 바로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를 드래그하다 보면 알게 되지. 몇 월 며칠, 오늘을 기점으로 옛날 메시지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과거로 드래그해 가는 게 아니라 거꾸로 '오늘을 향해서 모든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가까운 누군가의 고나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대번에 이해할걸.'





H가 몸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 밤새 침대에 누워 불안하게 들여다본 것은 비단 검색창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지난 카톡 대화나 문자메시지들도 들여다보게 됐다. 오늘의 걱정과 불안을 모르던 시기. 주식 얘기, 맛집 얘기, 드라마 얘기, 데리러 와달라는 얘기, 그래서 뭐 좀 먹자는 얘기들이 가득했다. 곧 호되게 뒤통수 때려 맞을 도 모르고, 그런 것들은 도란도란 모여 앉아 천진했다.


증상은 후로도 서너 차례 계속됐다. 다리 힘 빠짐이 몇 번 더 나타났고, 어떤 날은 힘 빠짐보다 어지러움증이 더 심했다. 대학병원 신경과에 예약을 잡았다. 의사는 원한다면 머리검사를 한번 해보겠냐고 권했다. H는 꼭 하고 싶다고 답했다. 심전도와 혈액검사, 그리고 MRI 검사를 진행했다. MRI는 판독에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H는 왠지 자연 치유되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축척되온 어떤 결괏값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억울함이 밀려왔다. 남들보다 먹고, 마시고, 피웠는데....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H도 나한테만 이러나 싶었다. 그간 해온 운동들도 짓 같이 느껴졌다. 갑자기 초라해졌다. 후줄근한 신세 한탄스러웠다. 타고난 복이  모양이니  더 보태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게 다 의미없어 보였다. 어디 가서 요양이나 할까.


되짚어 보면 올초 이상하게 밝은 기대와 목표치를 잡았던 것도 웃기고 헛헛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런 건 H 스타일이 아니다. H는 어려서부터 네거티브한 인물이었다. 뭐 좀 기대할라 치면 이상하게 일이 꼬였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 같다느니, 24년의 시간들, 인연들, 업무들을 좀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느니 그런 건 H와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말을 뱉은  화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든 있는 힘껏 비꼬고 냉소해야 속이 편했다. 그래야 결괏값이 나쁘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니까.  '그러게 괜한 머피의 법칙 만들지 말라고 했지' H는 갑자기 모든 게 서글퍼졌다. '난 누구보단 오래 살아야 하는 엄청난 사명이 있는데.' 아! 이 새끼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H는 속으로 호되게 자신을 나무랐다. 그간 쌓아온 모든 것들이 체계와 축이  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의지할 지팡이 하나 없다는게 놀라웠다. H는 뭐든 열심히 해온 것들은 그것이 뭐든간에 자신을 다잡아줄 구체적 구조물이 되어 줄줄 알았다. 거기 처마 아래서 잠시 비를 긋고 다시 일어날 힘을 얻을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당장 뭘로 자신을 지탱해야 할지 몰랐다. 딱히 어떻게 할 노릇이 없으니 H는 막막했다. 누구를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당분간 그런 건 불가능했다. 그냥 모든 걸 망쳐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꾸역하고 올라왔다. 백석 시인의 말대로 더 높고 깊은 것이 있어서 자신을 마음대로 굴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러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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