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H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오이 Jan 11. 2024

성과평가 이의신청서가 들어왔다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근평이나 성과등급을 받아나 봤지, 상급자로서 점수를 매겨본 것은 H도 처음이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뭐라도 주는 쪽에 정이 돋지 뺏는 사람에겐 눈초리도 사납다. 나름 고심해서 점수를 매겼건만 받는 입장에선 일단 섭섭하기 그지없었나 보다. 아예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의신청 확률을 높게 보진 않았었다.  H로서도 막상 상황이 닥치자 무척 당황스러웠다. 결과적으로 평가표를 두고 섭섭한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H는 곧바로 면담을 시작했다. 일부러 차를 몰고 나가 동료 직원들을 피할 수 있는 조용한 카페를 선택했다. 마주 앉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H는 잠시 난감했다. 우선 듣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구구절절한 자기 입장이 표명됐다. 이해도 가고, 한편으로 반론도 생기는 다중적인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K는 자기 업무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다. 누구보다 업무연찬을 열심히 했으며, 예산·계약분야에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예산·계약담당자는 니 혼자뿐이잖아. 비교자체가 무의미하지.) 아침에 나와 청소하고 퇴근 전 문 잠그는 일도 도맡아왔다고 했다. (그건 I팀장이랑 다른 팀 동생들도 같이 하고 있잖아.) 가끔 1분씩 지각하는 K대리도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건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 그 팀에도 팀장님이 계신 걸.) 자기 팀 막내인 M은 출장이나 조퇴 등 근태를 비롯해서 추진업무에 대한 보고를 일절 안 한다고 했다. (그건 대리인 네가 보고받을 일이 아니지. 결재라인은 팀장님을 타고 올라간다니까. 그리고 업무 분장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 밖에선 경쟁사회라고 했다. 업무능력면에서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인정하면서 점수를 B로 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넌 전년도, 그 전년도에도 S를 받았어. 공기관의 특성상 정량화할 수 없는 업무 특성으로 인해 누구 한 사람이 최고 점수 퍼레이드를 영원이 어어갈 순 없어. 그리고 알다시피 하반기엔 J 대리의 축제업무가 가장 돋보였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넌 올 한 해 S팀장과 J대리와, M주임과, 그리고 또다시 I팀장과 마찰을 일으켰지. 너랑 부딪히지 않은 직원이 어디 하나라도 있어. 내가 한 해동안 주의준 게 몇 번이었지.)


K대리는 원칙주의자다. 계약 전 기본계획서를 만들고 거기에 타당한 원가산출을 풀어 합당한 견적을 받고 과업지시서를 작성해 품의해야 한다. 업체가 뭐 하는 회사인지 기본정보를 담은 파일을 가급적 품의서에 첨부하길 바라며, 견적서에 무슨 1식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동영상 하나를 제작하더라도 견적목록에 촬영, 편집, 이윤 등이 모두 세분화되길 바란다. 이런 프로세스는 보통 기계적으로 적용된다. 긴급히 기본계획 컨펌 없이 미리 업체와 미팅한다거나, 금액이 너무 소액이어서 과업지시서를 건너뛴다든지 하는 것은 배려나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업 담당자의 사정일 뿐, 프로세스는 일단 1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의다. 물론 K의 이런 방식이 힘을 얻었던 때도 있었다. 조직이 처음 만들어지고 각종 회계질서가 미처 자리잡지 못했을 때 K대리의 업무방식은 상사의 신임을 기에 충분했다. H로서도 그런 업무방식이 싫지 않았고, 계약·회계 업무의 특성상 친절 따윈 기본 디폴트값이 아니란 걸 이해했기에 오히려 업무적으로 K대리가 혼자 좀 외로운 포지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마찰이 생기더라도 K대리를 변호하는 쪽이었다. 어쨌든 계약서 작성도 없이, 그리고 착수나 준공에 대한 보고도 없이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는 일부 사업습관들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문제는 회계질서가 서서히 바로 잡히면서 일어났다. 사업 진행 중 돌발상황들이 자주 발생했고, 기민한 대처나 융통성이 발휘되어야 하는 시점에 종종 K대리의 업무 스타일이 발목을 잡았다. 가령 대금이 나가야 하는 시점에 K대리는 지급을 재촉하면서도 구비해야 하는 서류에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소액 수의계약에는 국세나 지방세 완납증명이 생략됨에도 불구하고 서류 확인을 원했으며, 세금계산서도 아니고 과세 의무도 없는 그냥 계산서를 무슨 이유로 전자로 발급처리 하길 고집했다. 막도장을 찍은 계약서를 막상 받아놓고서도 무엇이 찜찜했는지 인감증명서를 보완서류로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건 왼손으로 일처리를 밀어붙이며, 또  반대편에서 원만한 일처리를 막고 섰는 오른손의 고약함에 지나지 않는다. 진퇴양난의 고립무원 속에서 담당자들은 갈팡질팡했다. 가끔은 민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상급자로서 H는 종종 상황에 직접 관여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말이 내뱉어진 상황에서 인감증명을 떼러 문을 나선 저기 민원인에게 그 서류는 필요 없다고 K면전 앞에서 소리칠 수는 없었다. 그건 기관의 신뢰를 해침은 물론, 민원인의 화만 돋우는 상황을 만들 뿐이었으니까. H는 K가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기를 바랐다. 어째서 그 서류를 요청하는지 혹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문답을 이어가는 와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그걸 스스로 깨닫고 고쳐가길 원했다. 하지만 K는 상황을 공유하려 하지 않았다.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피곤해했으며 무엇보다 계약파트의 업무 지식을 어떤 고유의 지적 재산으로 인식했다. 스스로 애써 얻은 노하우이궁금하면 너희들도 직접 찾으라는 입장이었다. H로서는 그 인색함이 싫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더구나 아직 완숙하지도 않는 업무지식을 그리 아껴 똥으로 묵히면 무슨 소용이나 싶었다.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익혀지는 것들이다. 누구나 다 능숙해지면 그땐 오히려 네가 더 초조해질 수 있어.


H는 종종 술자리에서 K를 타이르곤 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들이 K의  남다른 애성 탓이라 생각했다. H가 보기에 K는 전적으로 일에서 보람을 찾는 스타일이다. 하긴 직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도 일을 경시하는 일부 태도에 대해서는 H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우선 자기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H도 거기엔 동의하는 부류였기에 K가 직장에서 느끼는 여러 불평·불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사람을 K는 유독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사람이 팀장 자리를 차고 앉은 것에 대해 온몸으로 반감을 가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레 그 이상의 능력이라 믿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K는 팀장 승진을 바라고 있었다. 최소 근무연수가 차는 순간 그는 스스로 팀장 승진을 건의할 듯싶었다. 문제는 그 평가를 스스로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H도 그런 적이 있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괴로웠던 순간들. 그러나 그건 상대적으로 큰 조직에서 근무할 때였다. 직원 수가 600여 명이 넘는 그런 큰 조직에서는 불평·불만들이 상대적으로 희석된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불평불만들도 셀 수 없이 많으니까 주목되는 목소리들이 잘 없다. 하지만 여긴 손바닥만 한 사무공간에 파견 신분인 H자신과 동료 팀장을 빼면 겨우 8명이 다가 아닌가. 계약서류 하나 잘못 들어왔다고 담당자 면전 앞에서 뱉는 한숨소리나, 이래저래 잔소리해봐야 나만 나쁜 놈 된다고 필터 없이 되뇌 불평들은 손바닥만 사무실을 곧잘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런 불편과 불쾌함 속에서 잔뜩 웅크린 직원들을 K는 보지 못하는 듯했다. H는 그런 점들을 타이르고 싶었으나 그건 타이른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상담은 의견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H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H생각에 K는 속 깊은 사람이다. 소명의식도 강하고, 무엇보다 일에 대한 순수함이 있었다. K가 직원들과 부딪히는 여러 지점들이 따지고 보면 다 업무적 신념에서 출발한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다들 대충대충 살자는 세상에서 FM을 고집하기란 얼마나 피곤하고 외로운 일인가. K가 만약 그런 것과 싸우고 있었다면 H는 어쩌면 이번에 큰 상처를 던져  것임에 틀림없다. H는 그 지점이 가슴 아팠다. K는 무뚝뚝한 한편으로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무실 뒷마당에 방울토마토와 땅콩과 블루베리와 상추를 심을 줄 아는 남자다. H는 여름날 K와 그 과실들을 따먹으며 서로 마주 보고 종종 웃었다. H는 밤새도록 K의 어떤 순수함을 짓밟은 것은 아닌지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더욱더  K가 이번 성과평가에서 한 포인트 끊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되었다. 성과에 대한 욕심보다 그 마음을 끊어 오히려 직원들의 마음을 얻길 바랐다. 1년이나 2년쯤 후에는 K스스로 자기의 승진에 대해 입을 떼야할 순간이 정말 올 것이므로 올 해는 이번 평가를 계기로 새로운 변화가 장착돼야 했다. 그것을 이해시키고 싶었으나 K로서는 그 모든 게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H는 당장 다음 달 본청 복귀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소속을 달리할 사람이 1년이나 2년 뒤의 일을 이야기한다니, 자기가 이야기하면서도 H는 정말 웃기는 소리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성과평가 재평가를 위해 인사위원회를 재소집하게 되면 이 문제는 K스스로가 수면 위로 끄집어낸 꼴이 된다. 점수의 타당성을 놓고 양측의 논리가 소명될 수밖에 없다. K는 자신의 신념에 비해 직원들과의 불화를 너무 가벼이 여기고 있다. 조직은 전체의 화합과 위계를 중시하는데 K의 이런 행동들은 눈밖에 날 우려가 높다. K는 누구보다 평판을 중시하면서도 자신의 평판을 깎아먹고 있었다. H로서도 고심이 담긴 점수를 바꿀 의향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미안함때문에, 혹은 이의신청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평가가 무언가에 구속된다는 것은 H로서도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남은 것은 선택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H는 배우고 있었다. 


H는 인사위원회 소집을 결정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솔로가 너무 재밌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