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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Jun 05. 2022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묘사'

양발 사용이 모두 가능한 작가?

죽어가고 있는 고양이의 눈을 보았다. 빛나는 미세한 국화 같은 노란색 동공이 맑게 개어 있어서 절대적으로 평온한 늙은 고양이의 눈, 그 조그만 뇌의 감각기관에 맹렬한 고통의 정전기가 뛰어 돌아다니고 있을 때, 고통의 총량을 내부에 꼭 닫아 넣어 바깥쪽에서 들여다보는 눈에 대해서는 조용하고 무표정했던 고양이의 눈, 그 고뇌를 자기만의 소유로 하고 타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고 있던 고양이의 눈, 그와 같은 눈을 하고 자신의 내부의 지옥을 견디고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나는 가지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카시가 그와 같은 인간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도를 탐색하는 노력에도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다.


- 오에 겐자부로/ 만엔원년의 풋볼 中에서



소설의 한 대목이지만, 동시에 한 편의 시(詩)로도 부족함이 없다.

많은 문학적 수사들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마음에 와닿은 표현도 없는 것 같다.  겐자부로의 소설은 보기 드문 만연체 형식이라 독자가 소설을 읽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 나도 만연체 글쓰기를 좋아한다. 보통 글쓰기 수업에서는 만연체를 지양할 것을 권장하지만, 이것은 작가 개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겐자부로는 대상에 대해 떠오르는 어떤 서사를 한 번에 몰아가는 스타일인 것 같다.


죽어가는 고양이에 대한 안과 밖의 균형적 묘사, 가늠할 수 없는 사유와 통찰의 깊이, 그리고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대문호의 칭호가 괜히 붙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얼마나 글쓰기의 경륜이 모아져야 저런 경지의 묘사가 가능한 것인지. 사실 묘사도 묘사지만 차에 치인 고양이가 그 조그마한 뇌에 고통의 총량을 닫아놓고 바깥쪽으로는 완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유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최근에 와서 나는, 쓰고 있는 글들의 깊이가 조금 모자라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소재 선택이나 찰나의 인상 포착은 그냥저냥 해도 역시 깊이 면에서는 아무래도 한참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거창한 인류애나 실존적 가치, 이런데까지 나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소재나, 이야기 위주의 서술에서 좀 더 가치, 원리, 개념 등의 추상적 사유들을 도출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쉽지가 않다. 현재 쓰고 있는 스타일과 정반대적 스타일의 글쓰기도 가능한, 이른바 손흥민 선수처럼 양발 사용이 모두 가능했으면 하는 것이다.


브런치 내에 종종 그런 글쓰기 스타일들이 보인다. 최근에 와서는 그런 글들을 가까이 읽으며 열심히 배워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아울러 글을 쓰는 목적과 관련하여서는 가급적 좋은 정서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글들을 쓰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쓰기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음으로써 오히려 주제의 자유로움이나 다양성을 해칠 수 있는 다소 철없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에 성실, 노력, 도덕, 공익, 배려 등의 삶의 기본 가치를 가볍게 다루는 사유이 늘어나고 있는 것다소 걱정스럽게 느껴진다. 과거의 권위적, 일방적 가치들을 타파하는 것도 좋지만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본 가치들이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것은 막고 싶다.

 '이기적이어도 좋아' 같은 구호들이 일시적으로 개성과 다양성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과하여 세상의 주류 정신으로 나서는 것은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1964년에 <개인적인 체험>이라는 소설을 출간하며 집필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장남이 장애아로 태어난 것, 이것이 내 소설의 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인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으나 이 일로 인해 인간을 격려하는 문학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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