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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Sep 30. 2022

분꽃 1

유년 시절의 꽃

시골에서 분꽃은 보리방아 찧을 때를 알리는 시계였다. 가을에 추수한 쌀은 한꺼번에 읍내 정미소에 가서 방아를 찧어다가 뒤주나 독에다 갈무리해 두었지만, 초여름에 거둔 보리는 껄끄러운 겉껍질만 벗겨낸 겉보리째로 두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절구질을 해서 보얗게 대껴야 먹을 수 있었다. 분꽃은 보리방아를 찧을 때 피는 꽃. 그건 분꽃이 어린 나에게 이해시킨 저녁이었다. 엄마하고 작은엄마는 마주 보고 쿵더쿵쿵더쿵 절구질을 하면서 시부모 흉도 보고 동네 소문도 퍼뜨리면서 신나게 스트레스 해소는 했다. 나는 그 옆에서 분꽃을 따다가 밑동을 자르고 나서 암술과 수술을 쏘옥 뽑아내고 밑둥을 입에 대고 불었다. 뚜우 하는 빈약한 소리밖에 낼 수 없었고, 입에 댄 부분이 뭉그러지면 그나마의 소리도 안 났지만 나는 그것을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했다. 보리방아 찧을 무렵은 동무 없이 온종일 혼자 논 계집애에겐 가장 심심한 시간이기도 했으리라.

 - 박완서, <유년의 꽃> 박완서 산문집, 『두부』 128쪽   

  

박완서 산문집 <두부>

박완서는 분꽃이 보리방아 찧을 무렵, 초여름 해 질 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따다가 나발을 부는 유년기의 기억이 담겨 있는 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가 ‘분꽃 피리 소리는 보리밥 먹고 뀌는 계집애 방귀소리 같다’고 작은엄마의 핀잔을 듣기도 했던 꽃입니다. 이런 기억이 박완서에게만 있었겠습니까?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추억 한 보따리쯤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도시에서 보기 힘들지만, 집 근처 어느 음식점 앞에 심어놓은 이 꽃을 만나기 위해 며칠 낮을 헤매다가 결국엔 나돌아 다니기 힘든 밤을 택해서 일부러 가서 만나고서야 직성이 풀렸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박완서는 한 마디로 그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분꽃은 한 송이만으로도 저녁을 밝히기에 충분한 꽃이다.”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비애(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전문  

        

분꽃은 초여름 해 저물 무렵 마당 한구석에 자리 잡고 꽃을 피웁니다. 두엄 창고 옆이나 닭장 옆에서, 뒤뜰의 장독대 옆에서 무성하게도 자라나 붉게, 노랗게, 혹은 얼룩으로 수북한 꽃을 피워 냅니다. 햇빛이 따가운 한낮엔 입을 다물고 축 처져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귀신같이 해넘이를 알고 피어나는 꽃, 석양의 빛이 물들어 화사해진 꽃잎, 거기에 달빛까지 더해져 환상적으로 빛나는 꽃입니다. 장석남은 ‘저녁을 밝히고’,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후 4시가 되면 꽃을 피운다고 해서 영어로 Four-O’clock flower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그러니까 시계가 없던 시절 분꽃이 피면 슬슬 저녁을 준비하곤 했던 것이지요. 나팔꽃은 해가 뜨면 꽃잎을 열고 해가 뜨거워지면 꽃을 닫고 시들어버립니다. 두 꽃은 약간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에 달빛처럼 노랗게 피는 달맞이꽃도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꽃향기는 시간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보통은 한낮에 강한 향기를 내뿜지만 이에 비해 밤에 피는 달맞이꽃이나 분꽃은 밤에 향기를 발산합니다. 박완서는 저녁이면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그 쓸쓸함과 서글픔, 저녁에 화사하게 피는 분꽃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배고픈 시절 보리를 찧으면서 마당에 있는 분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혹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까닭으로 분꽃은 ‘유년기의 꽃’이 된 것이겠지요.  

   


분꽃의 꽃잎은 마치 요술쟁이 같습니다. 노란색이 핀 분꽃 씨앗을 받아 가져다 노란색 분꽃을 보려고 심어놓으면 이상하게도 붉은색 분꽃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때론 노란색, 붉은색, 흰색 가운데 하나의 색으로만 피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색깔과 무늬가 어우러져 피기도 합니다. 그래서 밤에 불빛을 비추고 보면 환상적이기까지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 분꽃의 씨앗을 갈아다가 여자들 화장품 가운데 얼굴에 하얗게 바르는 분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분꽃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확인해보니 역시 씨앗을 가루 내서 예전에는 분으로 사용했고 지금은 기미나 주근깨를 없애는 화장품의 원료로 쓴다고 합니다.   

  

한여름이 지나면 분꽃들도 점차 줄어들어 갑니다. 수많던 꽃들도 수그러들고 이미 수분을 마친 꽃들도 문을 닫고 땅으로 곤두박질칩니다. 화사한 분꽃 대신에 까만 수류탄을 갊은 작은 씨앗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이 씨앗을 따다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이곳저곳에 뿌려주었지요. 아무 데나 뿌려놔도 싹을 내서 풍성한 분꽃을 또 볼 수 있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새로 만나는 분꽃. 그게 제 기쁨이었지요. 지금도 그 기억으로 예쁜 꽃의 씨를 만나면 털어서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잘 필만한 곳에 뿌리곤 합니다. 

    


해 질 무렵 서늘한 바람에 흔들리는 분꽃을 찾아온 산책길, 씨앗 몇 개를 따다가 가루를 내어 어린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얼굴에 분을 발라볼까 합니다. 남자가 분을 바른다고 주책이라 흉보지 마세요. 유년기의 추억은 모든 것을 감싸주고도 남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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