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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Sep 30. 2022

분꽃 2

‘분꽃 누나’ 같은 어느 수녀의 이야기

동네 철길 너머 아직은 논밭이 있는 시골길을 오후 늦은 시간에 산책하다 만난 진분홍색 분꽃, 그동안 밤에 만났던 색색의 화려한 분꽃이 아니라 단색의 수수하고 수줍은 고향 꽃이었습니다. 수많은 가지를 뻗고 수북하게 많은 꽃을 피운 분꽃을 보고 서서 저는 왜 어린 시절 소꿉놀이하던 ‘분꽃 누나’를 떠 울렸을까요? 더 나아가 분꽃을 닮은 한 수녀를 떠올렸을까요?

    

분꽃을 보고 떠올린 수녀는 다름 아닌 이해인 수녀입니다. ‘이해인 수녀’ 하면 우리는 ‘민들레의 시인’이라 알고 있습니다. 워낙 <민들레의 영토>라는 시집의 잔상이 큰 까닭이겠지요. 그러나 수녀님의 시를 읽다 보면 저 근원적인 곳에 자리 잡은 꽃은 민들레가 아닌 항상 우리  뜰에서 우리 곁을 지켜주고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 같던 ‘분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늘

해질녘이 좋았다     

분꽃과 달맞이꽃이

오므렸던 꿈들을     

바람 속에 펼쳐대는

쓸쓸하고도 황홀한 저녁     

나의 꿈도

바람에 흔들리며

꽃피기를 기다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이 핑 도는     

이별의 아픔을

아이는 처음으로 배웠다

     - 이해인, <해질녘의 단상> 일부   

    


유년기의 이해인은 분꽃에게서 처음으로 이별을 배웠고 결국은 부모님과의 이별하고 일찍 수녀가 되었습니다. 속세를 끊고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와 분꽃의 추억을 잊지 못하지요. 분꽃을 통해 자연과 신의 섭리를 배우게 됩니다. 수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식 부모 간 향내를 이토록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해인은 비록 수녀가 되었지만, 인간 세계와 단절된 고립무원의 수녀가 되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분꽃과 같은 누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해인 수녀를 ‘분꽃 누나’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분꽃 누이 같은 내음을 여러 곳에서, 그의 많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엄마는 해마다

분꽃 씨를 받아서

얇은 종이에 꼭꼭 싸매 두시고

더러는 흰 봉투에 몇 알씩 넣어

멀리 있는 언니들에게

선물로 보내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분꽃 씨를 뿌렸단다.

머지않아 싹이 트고 꽃이 피겠지?"

하시며 분꽃처럼 환히 웃으셨다.     

많은 꽃이 피던 날

나는 오래오래 생각했다     

고 까만 꽃씨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푸른 잎이 돋았는지?

어쩌면 그렇게 빨간 꽃 노란 꽃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고 딱딱한 작은 씨알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 부드러운 꽃잎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지?     

나는 오래오래

분꽃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 이해인, <엄마와 분꽃> 전문  

             


당신의 이름에선

색색이 웃음 칠한 시골집 안마당의

분꽃 향기가 난다.

안으로 주름진 한숨의 세월에도

바다가 넘실대는 남빛 치마폭 사랑

남루한 옷을 걸친 나의 오늘이

그 안에 누워있다.     

기워주신 꽃 골무 속에

소복이 담겨 있는 유년의 추억

당신의 가리마 같이

한 갈래로 난 길을 똑바로 걸어가면

나의 연두 갑사 저고리에

끝동을 다는 다사로운 손길

까만 씨알 품은 어머니의 향기가

바람에 흩어진다.     

   - 이해인, <어머니> 전문  

        

어머니의 시절엔 요즘처럼 다양한 화장품이 있지 않았겠지요. 분꽃의 씨를 갈아 만든 분첩으로 얼굴을 찍는 정도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집 어머니에게서는 분꽃 향기가 났고, 그런 분(粉) 향기를 가진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고 우리 누나였습니다. 가장 평범한 우리의 어머니이자 누나였습니다. 가장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소중한 어머니이자 누나입니다. 어머니와의 분꽃에 관련한 이야기를 통해 그는 자연의 법칙, 자연의 이치, 곧 신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분꽃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어머니의 분꽃 향기가 자신에게 겹쳐져 자신도 분꽃이 되고 ‘분꽃 누나’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누리는

조그만 천국     

그 소박하고도 화려한

기쁨의 빛깔이네

붉고도 노란 -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땅에서도

태양과 노을을 받아 안고

그토록 고운 촛불

켜 들었구나     

섣불리 말해 버릴 수 없는

속 깊은 지병(持病)

그 끝없는

그리움과 향기이네     

다시 꽃피울

까만 씨알 하나

정성껏 익혀 둔 너처럼     

나도 이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의 씨알 하나

깊이 품어야겠구나

  - 이해인, <분꽃에게> 전문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 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詩語)들이 생각납니다.

신이 정겹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 이해인, <가을편지> 부분    

      


일찍 부모님과 이별해야만 했고 그리하여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약하고 수녀가 되었겠지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이 사는 속세를 떠났다지만, 여전히 자식으로서 부모의 향내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숙명, 수녀가 되었어도 우리 추억 속 ‘분꽃 누나’와 같은 수녀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분꽃의 검은 씨앗에 마음을 투영하여 ‘섣불리 말해 버릴 수 없는 / 속 깊은 지병(持病) / 그 끝없는 / 그리움과 향기이네’라고 고백하지요. 그러나 그는 이미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수녀의 몸, 그렇기에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도의 씨알’이 되는 것이겠지요. 이젠 그에게 하늘이 하는 일을 사람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진리를 깨치게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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