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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Oct 04. 2022

달맞이꽃

아무리 흔한 잡초라도 사연 없는 꽃은 없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얼마나 그리우면 꽃이 됐나”  

   

이 구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대중가요 <달맞이꽃>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전 이 노래의 1절과 2절의 첫 구절인 이 부분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낍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깊었길래 꽃이 되었나? 꽃 가운데 기다림의 끝에 꽃이 된다는 전설이나 이야기를 가진 꽃으로 능소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능소화는 화려함에 가려 기다림이나 그리움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지만, 달맞이꽃은 이 노랫말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꽃입니다. 아니 어울린다기보다는 기다림과 그리움 그 자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한낮의 뜨거운 햇빛에 견디지 못하고 시든 꽃잎을 한 달맞이꽃의 모습은 한갓 잡초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혀 달맞이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달맞이꽃의 아름다움은 해가 넘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달맞이꽃의 이름을 한자로 ‘월견초(月見草)’ 혹은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합니다. 밤이 되면 달맞이꽃은 은은하면서도 수수한 향기를 발산합니다. 물론 밤에 찾아오는 나방과 파리 등의 곤충을 유혹하여 후손을 만들기 위한 식물의 본성입니다. 식물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영원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식물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즉 자손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만들어 냅니다. 곤충을 유혹하는 진한 색깔, 향기, 때로는 가짜 꽃까지 만들어 냅니다. 곤충이나 동물들에게 먹힐 때도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지켜냅니다. 최문형은 <식물처럼 살기>에서 이것을 ‘식물병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달맞이꽃도 자신의 전략을 짜서 종의 번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맞이꽃은 우리에게 애절함의 정서를 투영하는 꽃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달맞이꽃이 자신의 이름처럼 누구도 바라봐주지 않는 밤에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에 좋다는 달맞이꽃 종자유 때문에 꽃 이름은 익숙해도, 정작 활짝 핀 달맞이꽃을 본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죠. 밤에 시골길을 운전하다 보면 창가 높이까지 큰 키로 피어있는 달맞이꽃을 만나곤 합니다. 저는 가던 길을 멈추고 창문을 열고 달맞이꽃을 손으로 잡아끌어 코에다 대고 향기를 맡으며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다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달맞이꽃은 애절한 슬픔과 그리움을 가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에 비견됩니다. 이기주는 그의 책 <언어의 온도>에서 '아무리 비천한 몸뚱이를 가졌더라도 사연이 없는 것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한갓 잡초에 지나지 않는 풀이지만 달맞이꽃에도 말 못 할 사연을 가진 한스러운 여인의 모습과 꽃말처럼 ‘기다림’의 정서가 떠오르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달맞이꽃

                        - 이용복 노래 / 지웅 작사 / 김희갑 작곡(1972년 발표곡)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아-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얼마나 그리우면 꽃이 됐나.

찬 새벽 올 때까지 홀로 되어

쓸쓸히 쓸쓸히 시들어가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아-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이용복 <달맞이꽃> 음반


위의 노래는 이용복이 노래한 <달맞이꽃>이라는 노래의 가사 전문입니다. 이용복에 대해서는 꼭 이야기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미리 짐작하셨겠지만, 이용복이란 가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서양에서 시각장애인 가수라고 하면 미국의 ‘스티비 원더’가 우선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용복을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고 부릅니다. 이용복은 대한민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가수로 <어린 시절>, <달맞이꽃> 등 많은 히트곡을 냈습니다. 인터넷 등 관련 자료를 보면 그는 선천성 소아 녹내장을 앓았고 8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어 맹아 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197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수로 데뷔했는데, 처음엔 시각장애인이라서 주목을 받다가, 1971년에 신인 가수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가수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기타리스트로서도 재능이 있어서 양희은의 데뷔 앨범 《아침 이슬》에서 12줄 기타를 맡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1972년과 1973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받으면서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의 시설이나 복지는 꿈에도 꿀 수 없었고, 장애인들에 대해 손가락질하고 차별하고, 오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가수를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저도 불의에 장애인이 된 지금에서야 절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정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대중가요 가수의 애절함이 담겨있어서 더 애틋한 곡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슬픔이 잔뜩 묻어납니다.    

  

이 노래는 이용복 이외에도 다른 가수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덮어 부르면서 계속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절한 천재 가수 김정호, 가왕(歌王)이라 일컬어지는 조용필, 김추자, 강촌사람들, 버들피리. 김수희, 주병선을 거쳐 마지막으로 장사익의 절창으로 정점에 다다랐습니다.     

     

달맞이꽃이 ‘애절함’과 ‘그리움’의 꽃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의 전설이나 신화에 그런 감성을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길지만 제가 조금 줄여서 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둘 다 큰 줄거리에서 달을 사랑하는 여인 혹은 요정이 죽어서 달맞이꽃이 되었다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태양신(神)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어느 인디언 부족은 주로 낮에 활동하는 무척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미모의 아가씨 로즈는 낮보다 밤을 좋아했고 태양보다도 달을 더 좋아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15세 된 처녀들이 곱게 단장을 하고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면 총각이 한 사람씩 나와서 마음에 드는 처녀를 골라 결혼을 하는 축제가 열렸다. 그런데 여기에는 부족에 공이 큰 총각부터 마음에 드는 처녀를 먼저 고르는 규율이 정해져 있었다. 이제 막 14세 된 로즈는 축제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제 부족의 추장집에서 5년 동안 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추장의 작은아들을 만나 서로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달을 더 좋아하는 로즈의 눈에는 작은아들이 달로 여겨졌다. 그 후로 밤이 되어 달구경하는 로즈의 옆에는 추장의 작은아들이 있었다. 해가 바뀌어 또다시 축제의 날이 되었다. 로즈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추장의 아들은 로즈 옆에 서 있는 다른 처녀를 데리고 가 버렸다. 다른 남자가 다가와서 로즈의 손을 잡았고, 로즈는 몹시 절망하여 도망쳤지만, 신랑을 거절한 로즈는 귀신의 골짜기로 쫓겨났다. 로즈는 밤이면 달을 쳐다보고 하염없이 울면서 사랑하는 추장의 작은아들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곱기만 하던 로즈의 얼굴은 차츰 여위어갔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축제의 날 추장의 작은아들은 문득 로즈를 생각하고 귀신의 골짜기를 찾아갔다. 추장의 작은아들은 가엾은 로즈를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추장의 아들은 희미한 달빛에 한 송이 꽃을 보았을 뿐이었다. 추장의 작은아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로즈가 죽어서 한 송이 꽃이 된 것이었다. 로즈는 죽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 밤이면 달을 보고 피어났다. 이 꽃이 바로 달맞이꽃인데 로즈가 사랑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죽었듯이 달맞이꽃도 2년을 살고 죽는다.

 - 출처 ; <달맞이꽃>, 문화원형백과 한의학 및 한국 고유의 한약재,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첫 번째 이야기에 딱 어울리는 시가 신귀숙의 <달맞이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진한향기 뿜어내며

비단결 처럼 피어나는 너의 자태

달무리를 하는가 밤하늘을 보는가

비바람에 출렁이는 너의 모습

님 그리워 서럽게 부서지고

불빛 아래 당신을 그리워하며

천 년의 여름날을 노오랗게 물들이네

 - 신귀숙, <달맞이꽃> 부문   

  


두 번째 이야기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먼 옛날 그리스에 별들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이면 호숫가에 모여 하늘에 빛나는 별과 별자리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다른 요정들과는 달리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있어 혼자 외톨이로 지내야 했습니다.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싫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하늘을 보며 “별들이 없어지면 내가 좋아하는 달님이 밤하늘에 홀로 빛날 텐데…….”라고 말했습니다.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은 이 소리를 듣고 몹시 놀라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제우스는 불처럼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는 달을 사랑하는 요정을 달이 없는 곳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요정은 날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달을 그리워하고 기다렸습니다. 달의 신은 자기를 사랑하던 요정이 자기를 볼 수 없는 곳으로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제우스 몰래 그 요정을 찾아다녔습니다. 제우스는 달의 신이 가는 곳으로 미리 구름과 비를 보내어 달이 요정을 찾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결국에 달을 사랑하는 요정은 어느 호숫가에서 애타게 달을 기다리다 죽고 말았습니다. 달의 신은 죽은 요정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원망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양지바른 언덕에 잘 묻어 주었습니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우스는 자신이 좀 지나쳤다고 후회를 하며 달을 사랑하다 죽은 요정의 넋을 꽃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이 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세상이 어둠 속에 잠기고 달이 뜨면 비로소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시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꽃에는 '달맞이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시가 김춘수의 <달맞이꽃>입니다   

  

그리스 신화처럼 꽃 한 송이

희부옇게 피어나는가 하더니

얼른 얼굴을 가린다.

 - 김춘수, <달맞이꽃> 전문      

    


달맞이꽃에 대해서 노래한 시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아마도 대표적 서정시인들은 한 번씩은 달맞이꽃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 시로 형상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인 수녀님만큼 달맞이꽃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시를 쓰신 분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당신의 밝은 빛

남김없이 내 안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렇게 얇은 옷을 입었습니다     

해질녘에야

조심스레 문을 여는

나의 길고 긴 침묵은

그대로 나의 노래인 것을,

달님     

맑고 온유한

당신의 그 빛을 마시고 싶어

당신의 그 빛깔로 입었습니다     

끝없이 차고 기우는 당신의 모습 따라

졌다가 다시 피는 나의 기다림을

당신은 아시지요?

달님

 - 이해인, <달맞이꽃>  

      

달빛이 스며들도록 얇은 옷을 입고 기다리며, 해가 저물 때 꽃잎을 연다는 외형적인 만남에서 시작하지만, 화자(話者)는 내면으로 들어가 침묵의 노래를 당신에게 부르고 달님에 의탁하여 맑고 온유한 빛을 달과 내가 일치되게 하고자 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는 하나의 꽃임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에게 있어서 달은 자신과 일치되고자 하는 대상, 즉 신적인 대상으로 치환시킵니다. 달의 모습을 따라 꽃의 모양도 달라진다는 표현은 달맞이꽃의 특성을 절묘하게 잘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언어적 감수성에 저절로 경탄이 솟아납니다.     

                                                

황금낮달맞이꽃(왼쪽)과 분홍낮달맞이꽃(오른쪽)


최근 원예종으로 만들어진 낮달맞이꽃이 주변에 많이 심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 공원이나 인근 상가 앞에 작은 화단이나 가게 앞에 내놓은 화분에 분홍낮달맞이꽃이나 황금낮달맞이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기후 변화로 아예 달맞이꽃이 낮에 핀 것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낮달맞이꽃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도 하게 됩니다. 마음은 달님에게 있지만, 낮에 피는 꽃이니 낮달맞이꽃은 달을 사랑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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