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명상을 마치면 <인생 수업> 책을 꺼낸다. 내가 찾은 인생 책이다. 이 책은 부산 구포동에 있는 내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 받았다. 집 책꽃이에 가지고만 있다가 작녁 8월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격리되면서 처음 읽었다. 이틀 만에 쭈욱 읽어서 그때는 음미하지는 못했다. 하루에 한 두장씩 요즘 다시 읽으면서 문장을 음미해보기도하고, 필사도 해보고, 글도 써보고 있다. 오늘 내가 마주한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나에게 묻는다.
미옥아, 너는 지금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거니?
아니면 고통 속에 있는 거니?
사람마다 느끼는 행복감, 고통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아픈 자녀를 간호할 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인 사람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녀가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만큼의 고통은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고통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고통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읽고 쓰는 일이 행복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운동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고통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기꺼이 즐겨면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에 따라, 그날의 감정 상태에 따라 느껴지는 행복감, 고통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
예설이가 있는 병실에 신환이 들어왔다. 남편과 보호자 교체하고 신환 한 명이 더 들어왔단다. 나와 남편이 예설이 치료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다르듯이, 소아암 진단받고 치료를 시작하는 보호자의 감정도 모두 다를 것이다. 그 마음을 겉으로는 알 수도 없지만 이야기를 같이 해봄으로써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조금씩 알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고통, 상실이라는 감정을 하루를 보내면서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분명 그것을 느끼는 사람은 그날의 소중함을 알 것이다. 소아암을 치료중인 자녀의 보호자들은 저마다 가슴속 한 가운데 자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자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이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이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그랬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녀를 떠나보낸 소식을 듣거나, 병원에 있을 때 코드블루 방송을 들을 때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잠시 잠깐 든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언제가는. 우리집, 우리가족, 내가 보던 책들, 노트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내가 소멸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오늘은 눈을 떴다. 그 뜻은 내가 살아있다는 말이다. 숨쉬고, 명상하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흔 한 번째 내 생일이다. 남편, 예빈이 예설이는 곁에 없어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오늘이 많이 생각날 것 같다. 나는 오늘이 가족이 곁에 없어서 고통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살고 있는 지구별에 존재한다. 이른 아침에 예설이와 남편과 영상통화도 했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받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는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선물같은 하루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괜시리 웃음이 난다. 오늘은 예설이가 퇴원해서 집으로 오면 제일 좋고, 퇴원이 안 되더라도 퇴근하고 바로 예설이에게 갈꺼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일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