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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저 킴 Sep 06. 2022

캐나다 주립공원, 곰 내려온다

Panorama Ridge, Garibaldi PP

Panorama Ridge, Garibaldi Provincial Park

Length 30.3km

Elevation: 1,531m


캐나다 BC 지역에서 하이킹을 즐기며 살아온 지 어느덧 2년,

나름 여러 산들을 오르며, 여러 트레일을 거닐며 아웃도어의 세계에 발을 들인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그 마음에 늘 그늘처럼 여겨지는 트레일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가리발디 주립 공원 (Garibaldi Provincial Park)에 위치한 파노라마 릿지 (Panorama Ridge)였다.


파노라마 릿지는 약 30km 정도의 트레일로서 완주하는데 평균 10시간 반에서 1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집에서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고 근래의 일몰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하루 정도 캠핑하며 트레일을 즐기는 게 여유롭고 좋겠지만 캠핑장비를 짊어지고 20km 정도의 산 길을 오르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 캠핑이 부담되어 이날 저날 미루다 여태 가보지 못 한 곳이었다. 이대로는 영영 못 갈 것만 같아 Labour day 가 포함된 이번 long weeked를 이용해 당일치기 하이킹을 하기로 결심했다.


산행 이틀 전인 목요일에 미리 데이 패스를 신청해 놓았고 토요일 오전 4:30에 집을 나와 주립 공원까지 가는데 2시간 정도 소요되어 오전 6:30에 하이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토요일 일몰 시각은 저녁 7:50 이기에

해 지기 전에 충분히 정복 가능 하리이다. 좋다. 해보자!




아침 일찍이라 선선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연휴라 그런지 이른 시각에도 다른 등산객들이 많이 보였다.

시작이 나쁘지 않다. 출발 시각도 계획 대로고 완만한 경사에 길도 잘 다져져 있어서 무리 없이 하이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제 8월에서 9월로 달력 한 장을 넘기고 와서 그런지 몰라도 시야에 들어오는 청록들이 한 여름의 것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고 느껴진다. 7-8월의 숲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의 느낌으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시푸른 빛을 내뿜는다. 반면 9월이 넘어가면서 그 빛은 여전히 건강하고 당당해 보이나 적당히 그 날카롭고도 시린 기운이 빠져나가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았다.

밴쿠버의 아름다운 여름도 이제는 저물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서글퍼지지만, 날마다 성숙해지는 것만 같은 이 숲이, 이 나무들이 또 다른 감사 제목이 되어간다. 나 또한 다가오는 가을의 모습처럼 눈부신 위풍당당함을 뽐내기보다는 주변의 많은 이들이 언제나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성숙하게 무르익어가는 사람이 되길 소망해본다. 



어느덧 전체 코스의 중반 즈음이라 할 수 있는 Taylor Meadow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7월부터 8월까지, 한여름에는 다채로운 야생화가 이 지역에 가득하다는데 벌써 한 풀 꺾여 야생화를 많이 볼 수는 없었다. 군데군데 빨간 꽃, 노란 꽃, 보라색 꽃들이 몇 송이 씩 흔들리고 있는 걸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지역부터가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곰 주의를 요하는 표지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주의를 끌만한 음식을 트레일에 흘리지 말고, 곰을 보게 되면 접근하지 말고 그 지역에서 바로 빠져나오라는 경고문이었다. 사실 나는 한 번쯤 하이킹 중에 곰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수많은 트레일을 다녀봤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산에서 곰을 봤다느니, 어느 공원에서 곰을 만나 죽은 듯 엎드려있다 곰이 흥미를 잃은 틈을 타 도망쳤다느니(군필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로 자기 군대 이야기할 때와 톤이 똑같았다) 하며 나름의 무용담들을 꺼낼 때 내심 부러운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 마치 영화처럼, 마치 거짓말처럼 나는 그 표지판 이후로 몇 걸음 못 가서 곰을 마주하게 되었다. Taylor Meadow 캠프 그라운드를 지나자마자 수풀 사이에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먹고 있는 까맣고 거대한 짐승을 보게 되었다. 내가 서있는 트레일에서 20m 정도 떨어진 우거진 수풀 사이에 곰이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 이라고는 이 거대 야수뿐이다. 스마트폰을 들어 일단 반사적으로 사진은 찍었으나 심장이 가쁘게 뛰고 생각은 멈추어서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온몸의 소름과 함께  그냥 얼어붙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보는 마지막 장면인가...


며칠 전 곰 스프레이를 샀다고 자랑하던 직장 동료와 나누었던 대화가 또렷이 기억났다.


"곰 스프레이는 장거리 산행에 필수야, 곰한테 뿌리면 곰이 바로 달아나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단 말일세."


"이보게, 기회가 되면 나는 그렇게 가까이서 곰을 한번 보고 싶네 그려... 곰한테 사용할 기회가 없다고 나한테 뿌리지나 마시게 껄껄..." 


젠장... 그걸 샀어야 해... 나는 그 스프레이를 샀어야 했어.


때늦은 후회가 몰려와 잠시 나를 괴롭게 했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저 앞의 곰에게 고정돼있었고 두려움이란 파도가 회한의 감정을 순식간에 다시 덮쳐버렸다. 두려움 앞에서 후회는 퍽이나 감상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그 순간, 뒤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젊은 남녀들의 재잘대는 대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이윽고 그들이 나와 곰을 발견했는지 소리가 끊어졌다. 나의 시선은 여전히 그 짐승에게 박혀있었다. 그때, 건장한 남녀 네다섯이 다시 깔깔대며 나를 가로질러 5미터 정도 곰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더니만 보란 듯이 그 짐승을 배경 삼아 셀피를 찍고 귀엽다느니 또 보자느니 하며 본인들 갈 길을 간다. 곰은 여전히 머리를 땅에 박고 무언가를 먹는 것에 바쁘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그 일행에게 바짝 붙어 곰을 벗어났다. 


'이게 뭐지? 그냥 이렇게 벗어나면 되는 거였나? 그냥 이렇게 지나가면 되는 거였나?'


곰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큰길까지 나와서야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나를 위기로부터 구해내 준 그들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그 젊은이들은 내가 자신들의 뒤에 딱 붙어 여기까지 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서로 웃고 떠들며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이제 10대 후반 혹은 갓 20대에 들어선 나이로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저 스쳐갔던 유희의 순간이 내게는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는 생각에 서러운 마음이 들며 힘이 빠졌지만 시간이 지체되었으므로 나도 바삐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코스가 남았다. 바위, 돌로 이루어진 경사에는 딱히 정해진 길이랄 것도 없이 

본인이 이 모든 장애물을 헤치며 길을 내어 올라야 하는 꽤 험준한 코스였다. 급한 경사는 발걸음을 무겁게 했고 발은 자주 돌 사이에 꼈으며 내리쬐는 태양 빛에 선글라스를 썼음에도 눈이 시려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지루하고 힘든 돌밭길이다. 1시간 반 이상 가야 하는 이 마지막 돌무더기 언덕이 이 트레일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마도 가장 어려운 코스가 될 것이다.




드디어 정상! 탄성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 느닷없이 펼쳐진다.

파노라마 릿지에 올라 바라보는 가리발디 호수의 빛깔은 진짜 하늘보다 더 하늘색에 가까웠다. 이 광경을 사실 어떻게 형용하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 아름답다! 어떻게 이런 색감을 내뿜는지 말없이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병풍처럼 펼쳐진 수많은 설산들의 모습 또한 이 풍경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곰을 보고 놀란 마음이, 돌 밭에서의 수고로움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보석 같은 가리발디 호수를 눈에 담으며 집에서 준비해 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이런 장소에서 무엇을 먹는다 한들 맛이 없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배도 든든해졌겠다 대자로 누워 한 숨 자고 출발하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묻어 두고 다시 한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내려가는 길은 역시 올라오는 길 보다 수월했다. 하지만 이미 6시간 이상을 걸었기에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서 오히려 올라올 때 보다 내려갈 때 자주 휴식을 취했던 것 같다.




막바지에 다르러 어둑어둑 해져서 불안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해가 있는 동안 안전하게 하이킹을 마칠 수 있었다. 공원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7시 30분 정도 되었으니 일몰 20분 전에 도착한 셈이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온 몸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있었지만 항상 마음에 짐으로 여겨지던 파노라마 릿지 트레일을 드디어 정복했다는 성취감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시 한번 해냈다! 


만약 당신에게 

1. 10시간 이상 산행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있다면,

2. 다음 날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있다면,

그리고

3. 곰 스프레이가 준비되었다면(!)


꼭 한 번쯤은 와보길 추천하는 멋진 트레일이다. 도전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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