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안고 살아갈 내 뒤 끝
큰 아이를 안고 운동화에 발을 미쳐 다 넣지도 못한 채 시가를 나왔다. 나는 시어머님이 악을 쓰는 그 순간부터 어떠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른이 이토록 소리치며 이성을 잃는 모습은 생전 처음 봤을뿐더러 시어머님 눈에는 나이 어린 며느리가 앞 뒤 생각 없이 둘째를 갖은 꼴 밖에 안 됐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진정이 되셨을까. 남편은 내 뒤를 따라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큰 아이와 잠시 친정에 가서 쉬다 오는 게 어떠냐 제안했다. 나는 싫었다. 시가에서도 쫓겨났는데 이대로 내 집에서 나간다면 쉬는 게 아니라 쫓겨남의 연장선일 것 같았다. 사실, 눈물 콧물 범벅에 눈과 코는 퉁퉁 부은 얼굴로 친정에 간다면 우리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실까 걱정됐다. 나는 부모님께 걱정 끼치는 게 세상 무엇보다 싫은 K-장녀다. 큰 아이 출산하기 전부터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우리 엄마 아빠한테는 내가 아기를 낳고 난 뒤 연락해 줘. 진통하는 모습 보시면 가슴 아프실 거야." 세상의 어렵고 힘든 것을 대신이라도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이라는 것을 내 아이를 낳고 알게 됐다. 내 아픔을 부모님께 전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울면 눈물방울도 아까워 가슴이 저렸다 하셨다. 전날 큰 딸의 두 번째 임신을 축하하며 맛있는 거 해먹이고 내 딸 쉬게 하려 손주 손잡고 놀이터에서 긴 외출을 하셨던 부모님이다. 내 부모님에게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쫓겨 나왔단 말을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님은 아이 하나에 단출하게 아들내외 하고 싶은 일 하며 자유롭게 살길 바라셨을 거다. 본인은 딸의 아이를 전적으로 봐주고 계시지만 아들내외가 힘들다고 하면 가끔은 외손자 친손녀 함께 봐주며, 힘들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들 옆에 두고 사는 게 보람 있다 생각하실 거다. 여행과 책을 좋아하는 시어머님은 황혼육아에 잠시 본 삶을 미뤄두고 살짝 힘에 겨워도 잘 버텨내고 있다 생각하실 거다. 그런데 아들내외가 둘째를 가졌다 이야기하자마자 본인이 잠시 미뤄뒀던 평온했던 삶은 저 멀리 날아갔다 생각이 드셨을 거다. 무엇보다 아들이 짊어질 아이 둘 아빠라는 가장의 무게가 안타까웠을 거다. 내 아들 편히 살라 마련해 준 아파트에 생각 없이 둘째까지 임신한 며느리는 시어머님 예상에 없었나 보다.
남편과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단순히 동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남의 자식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시어머님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포기했다.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받아들였다. 우리의 둘째로 시어머님과 남편의 연이 끊긴다면 내 아이가 불화의 원흉이 되는 것이니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생각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콩알만 한 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남편과 시가의 관계회복은 내가 직접 해야겠다 다짐했다. 다행히 우리 모두의 분노와 노여움은 시간에 흐려졌다.
둘째가 태어나도 나는 그저 집에서 편히 노는 나이 어린 며느리였고 어쩌다 감기에라도 걸리면 "집에서 노는 애가 왜 아파?"라는 농담을 듣는 며느리였다. 농담이라 하시는 그 말에 노발대발해 주는 남편과 시누이가 있으니 내 편이 하나 없다 생각되지는 않았다.
과연 시누가 아팠대도 똑같은 농담을 하셨을까?
과연 출산을 한지 일 년 된 시누가 둘째를 가졌대도 소리치며 나가라 하셨을까?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시간이 흘러 서러움은 흐려졌어도 나에게는 깊이 남을 슬픈 뒤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