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초등학교 생활은 여러모로 자유롭다. 일단 가방 속에 책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교과서가 없으니 가방 속에 책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하지만 뉴질랜드 아이들의 책가방은 한국학생들의 가방보다 크기가 훨씬 크다. 고학년이라서 큰 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저학년마저도 자기의 엉덩이 밑에까지 내려오는 큰 가방을 메고 등하교한다.
한국에서 1학년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온 첫째는 가방에 책과 노트, 학용품, 심지어 알림장마저도 넣고 다니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요일마다 시간표에 맞게 책과 노트, 필통, 체육복과 신발주머니를 보따리상처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던 나의 학창 시절과도 너무 대비되는, 든 것 없이 사이즈만 큰 뉴질랜드의 아주 간소한 책가방은 K-엄마에게도 낯설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책가방이 큰 것은 분명 이유가 있다. 급식이 없는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들의 가방 속에 도시락과 모닝티 시간에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이 잔뜩 들어있다. 오전 10시가 넘어 잠깐의 시간 동안 먹는 모닝티는 보통 작은 과자봉지와 과일들로 구성하고 점심은 샌드위치나 김밥, 유부초밥, 삼각김밥, 파스타, 치킨랩, 미트파이 등 요일마다 바꿔가며 준비한다.
한국에서 내가 싸본 도시락 이라고는 일 년에 두어 번 아이들의 소풍에 꼬마김밥, 뽀로로 카스텔라 빵, 방울토마토와 미니 소시지를 귀엽게 문어 모양내어 싸주는 게 다였다. 소풍도시락을 싸기 전날이면 마트에서 미리 꼬마김밥사이즈로 잘려있는 재료들이 한 패키지 안에 담긴 상품을 샀었다. 집에서 밥만 지어 넣고 도르르 말면 쉽게 완성되는 것이었지만 가끔 도르르 마는 것도 실패해 김밥을 자를 때 터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도시락 준비가 나에게는 새벽에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작해야 하는 큰 작업이었다. 도시락은 일 년에 두어 번 싸본 게 다니 실력은 항상 제자리였고 캐릭터 도시락을 원하는 딸과 아들에게, 엄마가 새벽부터 열심히 만들었지만 말하지 않으면 무슨 캐릭터인지도 모를 도시락을 내어놓으며 아이들의 눈치를 보는 쫄깃한 경험을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그때부터 급식을 이용하기 시작했으니 급식세대였던 K-엄마로서 아이들의 도시락은 소풍 때 말고는 쌀 일이 없는 연례행사로 심적 부담이 큰 이벤트였다.
도시락은 곧 김밥이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 급식세대의 K-엄마로서 뉴질랜드에서 5일 내내 아이 둘의 도시락과 간식을 매번 다르게 만들어 가방 속에 넣어주는 일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밥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엄마이기에 매일 다른 메뉴로 고기와 야채까지 쏙쏙 잘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이 거듭됐고 그러다 나는 금세 지쳐버렸다.
이유는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이 한입 베어 물고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먹는 것에 비해 크는 속도가 더디다 생각될 정도로 먹는 것에 진심이지만 뉴질랜드에서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노는 것에 진심이 되었다. 점심시간마저도 자유분방하여 싸 온 도시락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이 없기에 도시락을 열어보지도 않고 집으로 그대로 갖고 들어오는 날도 많다. 만약 한국에서 아이들이 점심 급식을 받고 손도 안 댄 식판을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본다면, 아이가 아픈지, 무슨 일이 있는지 주변의 걱정을 살 테지만 이곳은 뉴질랜드의 초등학교다. 아이임에도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스스로 내린 결정이 위험하지만 않다면 가만히 지켜봐 주는 곳. 그래서 종종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점심을 3시 이후 애프터눈티(오후 간식) 타임에 먹는다.
우리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엄마가 만들어서 가방에 넣어준 음식을 한입에 가득 넣어 물고 친구들과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놀기 바쁘기 때문에 진득하니 앉아서 먹어야 하는 엄마 도시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혹여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을 때 생소한 냄새가 나서 아이 친구들이 함께 먹지 않거나 놀림을 받을까 걱정했지만 뭐, 도시락을 여는 시간이 10분도 채 안될 테니 걱정도 몇 번 하다 말게 됐다.
그러다 도시락이 가벼워지는 날이 점차 많아졌다. 학교에서는 음식 알레르기의 사고 예방으로 친구들이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는 것을 안된다고 가르치지만 이민자가 워낙에 많은 뉴질랜드의 학교다 보니 인종도 다양, 음식도 다양하다. 그래서 방과 후 서로의 집에 자주 오고 가는 아이들은 친구들의 알레르기 유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선생님께 허락을 받으면 친구들끼리의 음식 셰어도 절대 안 되는 것도 아니라 하니 4학년이 된 딸은 친구들 일곱, 여덟 명과 함께 학교 큰 나무 밑, 잔디에 앉아 따뜻한 햇빛을 흠뻑 받으며 먹는 점심과 친구들과의 대화를 즐긴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서로의 도시락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친구들이 싸 온 처음 본 음식에 대해 알아오기도 한다. 먹어본 것 중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음식 이름도 친구에게 물어서 삐뚤빼뚤 적어와 구글에서 찾아보고 주말에 같이 만들어보기도 한다.
내가 만든 도시락을 좋아하는 이는 따로 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의 친구들과 선생님이다. 초록의 야채와 주황빛 당근, 노란 계란말이 블록과 단무지, 짭조름한 어묵까지 넣어 알록달록 예쁜 김밥을 만들어주면 그날은 집에 와 어김없이 빈 도시락통을 내민다.
어느 날, 큰 아이가 김밥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방과 후에 아이들과 같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재료를 손질해서 김밥을 함께 만들고 저녁으로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알록달록한 김밥을 싸간 날은 도시락 통이 열리기 무섭게 친구들과 선생님이 구경을 하러 온다고 한다. 하나씩 쏙쏙 가져가 맛보고 쌍따봉도 날려주고, 만드는 방법을 물어보는데 자기가 할 줄 몰라 엄마랑 한번 만들어보고 가르쳐준다고 했단다. 잊어버리기 전에 필요한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적으러 방에 가야겠다며 남아있는 김밥 한 알을 쏙 입에 넣고 큰 딸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우리 아이들은 알록달록 야채가 들어간 김밥보다는 참치김밥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볼품은 없지만 참치김밥을 자주 만들어준다. 채 썬 양배추와 당근도 살짝 섞어 참치인척 하지만 아이들에게 항상 들켜 다음엔 야채를 빼달란 부탁을 받기도 한다.
2학년이 된 우리 집 아들은 뭐, 여전히 한입 베어 물고 뛰어나가 놀기 바쁘다. 어쩌다 도시락을 싹 비운날이면 그날은 도시락을 땅바닥에 엎은 날. 그런 날이라고 한다. 자기가 땅바닥에 쏟아진 음식을 주워 담는 시간보다 주변의 갈매기나 새가 와서 채가는 속도가 더 빨라 치울 필요가 없다고, 엄청 편하다고 신나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가끔 아들의 도시락이 아닌 새의 도시락을 싸기도 한다.
그래, 누가 됐든 먹었으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