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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22. 2022

외로운 전쟁

칫솔질을 하다 쓰다


파랑 연두 분홍 노랑 보라색 다섯 개 들이였다. 보라를 꺼냈다. 특별히 좋아하는 색은 아니고 보라가 끝에 있어 꺼내기 쉬웠다.


꽝이었다. 뭐든 새 물건을 처음 쓸 땐 상쾌한 맛이 있는 법인데 입안에 퍼지는 건 불쾌 뿐이었다. 치약 거품 속에서 뭐가 자꾸 혀를 건드렸다. 잇새에 끼어 있던 섬유질인가? 이전에 뭘 먹었나 떠올려도 봤지만 아니었다. 음식물이 이렇게 뻣뻣할 리 없다. 손가락으로 입안을 훑어 꺼낸 건 솔 한 가닥이었다.  


새 칫솔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너그러이 넘어가려 했으나 실패였다. 보라는 이에 대고 문지를 때마다 한 가닥씩 솔을 떨궈냈다. 나도 오기를 부렸다. 이러다 말겠지. 설마 민머리야 되겠어? 며칠 지나니 보라는 솔이 한 뭉텅이 빠져 기계총 머리가 되었다.


내 속의 스크루지, 구두쇠 심술쟁이는 그 꼴을 보고 퍽 만족했다. 이 구멍은 불량이었나 보군. 접착 처리를 제대로 안 한 모양이라며 보라로 계속 칫솔질을 하려 했다.


보라는 다른 구멍에서 솔을 떨구기 시작했다. 며칠 후엔 기계총이 두 개 생겼다. 그래도 스크루지는 아주 포기하지는 않았다. 보라를 청소솔 자리로 이동시키고 노랑을 꺼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또 노랑이 이겼다. 뽕 뚫린 구멍에서 비어져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스크루지는 정신이 들었다. 얘들하곤 인연이 아니구나.


아깝다는 건 신기한 감정이다. 내 것인 줄 알았던 감정이 어느샌가 물건에게 옮겨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집착은 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기제가 아니다. 발휘하는 사람에게 불쾌와 고통을 줄 뿐이다. 내 손으로 입안에 껄끄러운 걸 넣고 문질러대고 있다. 노랑을 보라 옆에 놓으려다 파랑 연두 분홍 다 꺼내 휴지통에 넣었다.


여기서 끝내야 멋질 테지만 나는 끝내 구질구질하여 파랑 연두 분홍을 슬그머니 꺼냈다. 딱 한 번씩만 써 보자. 혹시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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