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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by 어니

2년 전 N시로 이사를 왔다. 차로 달려서 서울에서부터 장장 네 시간이 걸리는 지방 도시이다. 15분 정도면 도시 곳곳을 다 다녀볼 수 있고, 그 반경을 벗어나면 너른 논밭이 펼쳐지는 곳이다. 대학에 간 후로 줄곧 서울에 살았으니 15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나에게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닌다던가 하는, 어딘가에 소속된 삶을 의미했다.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내가 하던 일을 떠난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5년 전 또 한 번의 서울을 떠날 기회가 왔을 때와 다르게 흔쾌히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적어도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렇다. 떠나기로 했을 때는 나에게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때가 온다는 것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이고 어떤 하루들이 되는지.


N시에 온 후로 사람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던 그런 생활일지도 모를 생활이었다. 예전에 일을 할 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모든 단체 카톡방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때론 130명에 이르고 어떨 땐 열댓 명 되는 카톡방에 나는 늘 속해 있었다. 단체카톡방은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울릴 수 있고 거기 올라오는 메시지들은 구성원에게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암묵적인 부담을 주었다. 나는 단지 언제 어디고 나를 찾는 사람들로부터 아무 응답할 책임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휴대전화가 전혀 울리지 않는 조용한 주말을 바랐다. 날 찾는 전화가 울리거나 카톡 알림음이 뜨면 나는 가슴이 덜컹 먼저 내려앉았다. 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버거웠을까.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둔 기대들이 피곤했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실제의 나와 맞지 않다는 괴리를 느낄 때면 나 자신이 자꾸만 싫고 부끄러워졌다. 사람들의 평가나 비판만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 대한 칭찬이나 인정, 기대감이 더 두려웠다. 나의 겉모습을 보는 사람들, 나를 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 내 생각보다는 내 기능이 필요했던 사람들… 나는 나로 존재하고 싶지, 어떤 역할로만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호의를 건네는 사람들의 말속에서조차 그들의 시선이 가닿는 곳은 나를 그냥 통과하여 내가 가져오는 성과에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외로웠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 시간은 어쩌면 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비로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하루 종일 잠잠한 휴대전화가 지금도 한 번씩 생경한 느낌이 든다. 휴대전화를 볼 때마다 느꼈던 그 불편한 감정이 내게는 의식 이전에 있는 어떤 감각처럼 깊숙이 남았다. 언젠가는 아예 휴대전화가 없이 사는, 모두에게서 잊힌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아도 되는 타지살이가 나름 즐겁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들, 가볍게 일상만을 공유한 이웃들 사이에서 나는 마음껏 쾌활하다. 시력이 나빠서인지 남들도 나를 잘 못 알아볼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그래서인지 원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잘 의식하지 않는 나는 이 작은 도시와 좁은 동네에서도 편안하고 자유롭다. 아무도 나를 아는 체하지 않는 동네를, 원하는 모습과 순전히 원하는 용무로만 돌아다닌다. 가끔 혼자 카페에서 논문 작업을 하는 나를 멀찍이서 알아본 어린이집 아빠가 있었지만, 자주 만나지도, 길게 대화할 필요 없는 관계이므로 그 정도는 내게 괜찮았다.


사람들이 나를 잊기 바라는 마음 반, 내가 사람들을 잊기 바라는 마음 반으로 지내는 나날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나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무려 20년 넘게 연락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문득 N시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일지 잘 가늠이 안되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껏 그를 반겼다. 그는 멀리서 종종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와의 대화 속 나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내가 언제나 내 의견을 말하고야 마는 당찬 성격이라고 했다. 그런 그의 말을 듣는 나는 영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소심하고 소극적이라고 엄마가 걱정하던 나는 누구이고, 그가 기억하는 학급회의에서 번쩍번쩍 손을 드는 나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의 말을 들으며 나도 알지 못했던 나에 대해 깨닫는다. 생각해 보니 나는 늘 말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결국에는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글을 써두고서는 10번은 그냥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자 하고서 결국은 어디에라도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내 안에는 ‘말하고 싶어’ 외치는 자아와 ‘제발 말하지 마, 이번에는 진짜 말하지 마’, 하고 말리는 자아가 늘 싸운다. 이기는 쪽은 늘, 말하고 싶은 자아이다. 이 자아는 자기를 알리고야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부끄러운 자아를 기어코 이기고 목소리를 내고 만다. 사람들은 결국 표현하고야 마는 나만을 보기 때문에 내 어린 시절 친구처럼 누군가는 나를 확신 있고 심지어 당찬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한 번은 한 친구와 오랜만에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한 달여간의 독박육아 후 얻은 휴가에 나를 초대해 준 것이다. 평소 나와 닮은 점이 많다고 느끼는 그와의 만남은 내가 어떤 긴장감 없이도 선택하는 만남이다. 별다른 선약 없이도 갑작스럽게 내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는 손에 꼽는 친구이기도 하다. 친구 덕에 호화스럽게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우리는 요즘 읽는 책들 이야기,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앞으로는 뭘 할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는, 순수하게 좋아하는 취미에 대해 하는 대화는 우정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해 준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 거기서 나는 편안한 나 자체로서 누군가와 깊이 관계 맺는다.


친구와의 대화 중에, 그는 내게 ‘너는 너만의 글 스타일이 있잖아’하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말이었다. 특별한 의도를 갖지 않고 꾸준히 써 올렸을 뿐인 내 글에서 누군가는 나라는 사람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글 스타일’이라는 것이 문체일 수도, 글 속에 흐르는 의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에게 생김새와 고유한 성격이 있듯이 글에도 인격 같은 것이 새겨진다. 내가 글을 썼는데 글들이 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 대화 이후 몇 날 며칠 나에게 편안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 대화를 떠올리면 잠들기 전, 더할 나위 없이 행복감이 들었다. 잠자리에서 행복감이 드는 것은 정말이지 내게 흔한 일은 아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없어도 평생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내 안에는 아직 쓰고 싶은 것이 많고 말할 데가 없었던 마르지 않는 생각이 있다고. 나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지루하지 않을 인생이라고.


내가 누가 아닌지를 알게 해 준 것도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준 것도 사람들이다. 나를 제대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염증이 났는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를 나로 봐주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듣고, 읽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귀 기울여주는 그들이 내게 중요할 뿐이다. 내가 이루는 성과에 상관없이, 내가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와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 내가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에 그저 궁금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 단 한 사람이어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내가 그렇게 사랑한 도시, 지금도 역시 돌아가고 싶은 도시 서울에 계속 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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