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끝나고 나오니 열 시 삼십 분. 이미 옷까지 다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운전석에 앉아 다시 고민에 빠진다. ‘역시 목포까지 가는 건 오버인가…’ 오늘은 아이 하교시간까지 비교적 긴 시간이 주어진 요일이라 전에 눈 여겨봤던 책방을 멀리까지 다녀오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또 머뭇거린다. 그래도 안 간다고 딱히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서 별로이거나 오후에 좀 피곤해지더라도 안 가보는 것만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결국 출발을 한다. 요샌 전이라면 안 했을 방식으로 되도록 행동하자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대로만 경직되는 것도 싫고 갈수록 새롭고 낯선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의 50킬로를 달리는 동안 살짝 후회도 했다. 하지만 도착해서 책방에 자리 잡아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 빨리 찾아온 행복감에 당혹스럽다. 이토록 확실한 행복감이라니. 요즘 나는 거의 두 자아로 산다. 아침과 밤에는 극히 불행해하는 나. 그리고 낮엔 행복한 나. 어디든 책상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읽던 책을 세네 권 쌓아 이것저것 읽다 보면 금세 내면으로 파고들어 지는 낮의 시간.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이 제자리를 찾고 모호함에 쌓여있던 마음이 언어를 찾아 나오는 시간.
아침은 내가 하루 중 가장 불행해하는 시간이다. 온갖 자괴감, 수치심… 안개처럼 해 뜨면 사라져 버리고 싶은데 온 몸뚱이가 뚜렷하게도 살아남아 있는 절망감. 부끄러운 존재, 세상을 마주 볼 용기가 없는 쪼그라든 마음. 그것이 내 아침이다. 그것도 눈 뜨자마자 의식이 찾아오자마자의 아침. 밤은 나의 근심과 불안이 최고치를 찍는 시간이다. 현실적인 계산들, 답 없는 미래 계획, 나 자신의 가치를 따지고 매기는 시간, 가족들의 짐을 한 명 한 명의 분량씩 가슴 위에 쌓아보는 시간, 낮의 열정과 소망을 의심하는 시간, 온 우주의 먼지 한 점처럼 초라해지는 시간. 아침이 직관적으로 불행하다면 밤은 경험적으로 불행하다.
내가 불행해하는 이유는 그동안 오답을 너무 많이 골라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엔 정말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몰아세운다.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이유는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각도와 저 각도에서, 또 놓치고 있는 사각지대는 없나, 맹목적이거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끊임없이 따진다.
그러다 어젯밤엔, 자기 전 양치하다가 문득 휴대폰을 열어 메모장에 다짜고짜 이렇게 적었다.
“지금의 나는 가장 나다운 것이 맞다.”
이제까지 중에서 지금이 가장 나답다. 그렇기 때문에 이대로도 괜찮다. 그동안의 선택이 불완전했다는 것을 아는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옳다. 내가 지금 내려놓는 무언가를 후에 아까웠다고 후회할까 봐 염려하는 마음은, 이전에 내가 놓아버린 어떤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막연히 선망하는 그 길은 안 가봤기 때문에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선택은 그때의 포기와는 엄연히 다르다. 지금의 선택은 나에 대한 진실에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기 때문에 내리는 선택이다.
내가 밤에 그 문장을 마음에서 끄집어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건 한동안 고착됐던 ‘아침과 밤은 불행, 낮엔 행복’을 깨는 일이니까. 자동 재생되는 자책과 불안의 사슬을 어떻게든 의지로 끊어보고자 한 것이니까. 어쩌면 그 사슬의 고리는 조금씩 조금씩 이미 끊어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의 불행이 낮의 불행으로도 이어지려 할 때 다시 운전대를 꼭 부여잡는 의지로. 나는 지금 어떤 결말이나 정답을 찾아야 하는 때가 아님을 인정해 본다.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시간,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매일 의지를 들여 마주하는 나와의 시간에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더 편안한 마음이 되기. 그걸로 지금 충분하다.
멀리까지 찾아와 들춰 읽게 된 책들에서 나를 등 도닥여주는 문장들을 만난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