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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단상

by 어니

한 번씩 아이들 노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재밌는 데가 있다. 요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첫째가 이제는 슬슬 나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좀 시도해봤으면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밥공기 크기가 커지는 아이는 에너지가 뻗쳐 몸이 근질근질한 것이 보인다. 어떻게든 자기 몸을 더 큰 위험과 더 새로운 도전에 던져보고 싶어 하는 팔세 어린이가 집안에만 머무니 자꾸만 무언가를 던지고 어디선가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소리 질러 그러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아이가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새로운 길도 탐험해 보고 땅도 실컷 파고 줍고 싶은 것도 실컷 줍고 자전거도 씽씽 타면서 속도감도 즐기고 했으면 싶다. 또 그걸 어른이 다 쫓아다니면 그 맛이 또 아닌 것이다. 하여 한 번씩 등을 슬쩍 떠밀어본다.

‘엄마 저녁할 동안 나가서 놀고 와도 돼. 차만 조심하고. 너 우리 집 동호수랑 현관 비밀번호도 다 알잖아.’

하지만 어른 없이 혼자 있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아이에겐 좀 더 용기가 필요했다. 아니면 그 두려움을 한번 깨어볼 더 큰 재미가.


그러던 차에 같은 단지에, 심지어 바로 앞동에 저번 어린이집에 같이 다니던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끔 단지에서 마주치는 그 애는 이미 혼자 다닌 게 꽤 된 모습이다. "유호야 안녕~"하는 것을 몇 번 그렇게 마주치고 나니 이제 그 애도 유호를 대놓고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제는 저녁 해 먹고 아이 둘을 데리고 자전거를 타러 나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가 자전거 타고 단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호야, 나 너 기다렸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가 자리를 피해 줘야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둘이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고 하고 나는 놀이터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가 앉은자리를 한번 쓱 보더니 유호도 친구를 따라 멀리 달려갔다.


놀다가도 한 번씩 엄마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유호는 이번만큼은 꽤 오랜 시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곳에선가 놀이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궁금하면서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았다. 한참 후 아이들은 놀이가 지겨워졌는지 나와 윤아가 있는 놀이터로 돌아와 어느새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그때 유호가 "윤아야, 너도 같이 하자!"하고 동생을 껴준다. 엄마로서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셋이 술래잡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다 보니 재밌는 패턴이 있었다. 윤아가 술래일 때는 아무래도 게임의 긴장도가 뚝 떨어진다. 다섯 살이 여덟 살 오빠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놀이가 느슨해지려는 차에 오빠들은 대충 도망 다니다가 슬쩍 와서 윤아에게 잡혀준다. 그리고는 재빨리, "내가 술래!" 하고는 그러면 다시 순식간에 전력질주하는 술래잡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셋 다 꺅꺅대며 즐거워하는 시간이 한참 이어졌다.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서로 간에 힘의 균형을 찾는다.


예전에 어디선가 그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빠른 나이부터 '공평'에 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예를 들어 과자가 세 개이고 아이들이 세명이면 아주 어린아이들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한 사람당 하나씩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생존이 곧 공동체의 조화에 달려 있던 아주 오랜 시절의 본능,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박힌 오래된 습성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불현듯 깨닫는 게 있다. 아, 유호가 윤아를 놀이에 끼우려고 하는 것은 꼭 동생을 위하는 다정한 마음에서만은 아니구나, 친구가 자기보다 훨씬 빠르니 놀이가 계속되려면 자기보다 느린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 것이리라. 그래야 자기도 계속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테니까. 아이의 놀이 방식에 딱히 옳고 그른 것도, 칭찬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따금 머나먼 옛날 우리 조상들의 유전자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얼마 전엔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 전 세계의 멋진 ‘막대기’를 올리는 계정이 뜬 것을 보았다. 오죽하면 우리 집에 있는 그림책 중엔 한때 유호가 엄청 좋아하던 <준이의 아주 특별한 나뭇가지(원제:Stanley’s Stick)>가 제목인 책도 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별의별 잘생긴 막대기에 끌리는 사람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수렵하고 채집하며 적의 위협에 언제고 대비하던 부족 시절의 감각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유전자가 엄마 품에만 있으려던 여덟 살 아이를 이제 자기 세계의 경계선을 탐험하도록 슬쩍 떠미는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기의 욕구를 실현시키고 기지를 발휘해 세상과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가. 그것을 나는 성장이라고 부르고 안도를 한다.


계절이 가고 올 때마다 숨 가쁘게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이 머문다. 문득 떠오르는 쉼보르스카의 시 “우리 조상들의 짧은 생애”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른 살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노년기는 단지 돌이나 나무의 특권일 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80 )


그러고 보면 미래를 너무 거창하게 여긴 나의 고민들은 사실은 얼마나 과장된 것인가, 생각이 든다. 돌이나 나무의 것이었던 길어진 노년기를 나는 그냥 덤처럼 살아보면 안 될까 하고. 망망한 시간의 흐름의 일부인 나 자신을 보자니, 지금 나를 짓누르는 문제는 찰나처럼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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