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
"사람을 사랑하면 그 인물의 과거가 궁금한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을 사랑하면 저절로 주인공의 과거가 궁금해진다"
소설가 윤성희가 한 말이다. 소설을 배우면서 메모해 뒀던 말인데 인생에도 적용이 된다. 당연한 일이다. 소설만큼 인생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장르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알면 그 사람을 쉽게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나를 괴롭히는 직장상사가 한때는 배냇저고리를 입고 울어대던 온몸이 따끈한 아기였다는 걸 상상해 보라. 증오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묽어지지 않는가. 나에게도 과거를 알고 싶은 친구가 생겼다. 우린 십여 년 전에 만난 '과거의 사이'였다가 현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친구는 상계동 양지마을에 가보자 했다. 양지마을은 수락산 자락에 있는 달동네이다. 친구는 이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방이 두 개인 반지하에서 네 식구가 살았는데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이 너무 처절해서였다. 현대판 고려장을 당한 할머니도 실제로 봤으며 집이라고 할 수 없는 구조의 건물에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겨울철 외부 단체에서 연탄봉사를 하러 오는 게 싫었단다. 좋은 의도를 갖고 하는 행동이 당사자한테는 상처일 수도 있다. 나는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 말고 실제 달동네를 가본 적이 없다. 오래된 골목과 낡은 물건을 좋아하는 취향은 어쩌면 그런 것들이 진짜 삶이었던 적이 없어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동네에 호기심을 느낄 때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현실은 쏙 빼고 정취만 취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늘 잔잔하게 따라붙는다. (그러나 절대X10000000 내가 부자라는 소리는 아니다.) 달동네라고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김중 시인의 <사랑>이란 시이다.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흰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달동네의 주민들은 곱추거나 절름발이일 거라는 편협한 시각이 배인 감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그 뜻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정신적으로 곱추며 절름발이다. 두 다리로 정상적으로 걷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걸을 수 없다. 사랑의 속성이 비정상이라 그렇다. 나의 상태는 생각하지 못한 채 친구의 연인을 보고 '대체 왜 저런 사람을 사랑하지?'라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친구는 땅을 보고 기어 다니느라 상대방의 무릎 위를 보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만 타인의 정수리를 볼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사랑을 함부로 이해할 수 없다. 지독히 사랑하는 연인은 네 발이 된다. 짐승들처럼 물어뜯고 싸우다 엉겨 붙는다. 두 발로 선 상태에서는 포옹이 최대다. 포옹은 따뜻하지만 뜨겁진 않다. 흔히들 사랑싸움을 하는 부부와 연인들을 보고 '지지고 볶는다'라는 표현을 한다. 뜨거운 불 위에서 지져지고 볶아지는 것. 역시 멀쩡한 상태라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지지고 볶은 것들은 하나가 된다. 프라이팬 위의 밥과 김치가 김치볶음밥이 되는 것처럼. 나는 저 시를 읽을 때마다 쓰이지 않은 마지막 행을 직접 쓰곤 한다. 시 속의 절름발이 남편은 다음날 아침 설핏 잠든 아내의 등을 쓸어내릴 것이고 꼽추 아내는 술 먹은 남편을 위해 계란국을 끓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달동네는 이런 곳이었다. 네 발로 기고 싶어도 자꾸만 두 발로 일어나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닌 독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7호선 수락산역에 내려 친구의 안내를 받아 고개를 오르니 내가 상상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꼽추 아내와 절름발이 남편이 싸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재개발이 확정되고 태반이 빈집이었다. 남아있는 주민들은 노인들이거나 주인 없는 집을 무단 침입한 노숙자들이라고 했다. 친구는 골목을 누비면서 여기는 이 친구가 살았던 곳, 여기는 또 다른 친구가 살았던 곳이라며 설명을 해줬다. 친구한테는 아직도 이곳에서 살아 숨 쉬었던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유년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축한 알맹이다. 비가 와서 마을 전체가 유난히 고요해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를 밟으며 문득 우리가 유년의 껍질을 함께 벗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칙칙함을 밝히는 파란 대문을 보고, 이슬을 맞고도 화사함을 잃지 않는 꽃들을 보고,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주느라 어깨가 다 젖은 친구의 어깨를 보았다. 친구에게 기념사진을 찍어달라 하니 다리가 아주 짧아 보이게 찍어 놓았다. 내가 볼멘소리를 하자 친구가 머쓱하게 웃었다. 친구는 스무 살 때와 똑같이 웃는다. 친구를 보면 회색이 떠오른다. 콘크리트처럼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 언뜻 빛바랜 것처럼 보이지만 파란 대문과 꽃들을 품을 수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언제나 시작되는 나만의 버릇이 있다. 지나다니며 마음에 드는 건물을 보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나와 상대를 상상해 보는 일이다. 희한하게 초고층 아파트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파트의 높이에서는 무릎 아래의 사랑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누가 양지마을에서 살라하면 선뜻 대답을 하진 못하겠다. 나는 정말 모순적인 인간이다. 사랑만 있다면 단칸방에서 살 수 있다고 외치다가 누렇게 때탄 벽지를 보고 겁을 먹고 도망가버리고 만다. 김중 시인의 말이 맞다. 사랑은 이다지도 어렵고 독한 것이다. 그러나 네 발이 되는 게 사랑이라면,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는 게 사랑이라면 힘닿는 데까지 기꺼이 수그려보기로 했다. 달을 제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달동네이면서 볕이 잘 드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양지마을처럼 사랑은 모순 투성이니까. 사랑이 바로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