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사람이에요?"
서울에 와서 이 말을 자주 들었다. 진짜 서울토박이는 몇 안되고 이방인들이 모인 도시라 그런지 질문을 하는 상대도 지방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그럼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대전사람이요!"
대전에서 왔다고 하면 반응이 한정적이다. 나이가 꽤 있는 분들은 1993년도에 엑스포에 다녀왔다는 걸 회상하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의 기억엔 대전엑스포가 없는 듯하다. (꿈돌이를 모르시나요?) 거의 '노잼, 성심당' 두 가지다. 심지어 칼국수가 유명한 지도 잘 모른다. 그럼 난 칼국수 축제 모르냐며 흥분한다. 칼국수 건드는 건 못 참는다. 물론 대외적인 대전의 이미지가 어떤지 안다. 나조차 노잼이라고 느껴서 서울에 온 것도 맞다. 성심당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말에 달리 받아칠 말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지 모르겠다. 대전이 얼마나 재밌는지, 성심당 말고도 숨은 맛집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간혹 순해 보이지만 겉과 속이 다르기로 유명하지 않냐며 지역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내 성격이 그런 편이긴 하지만) 아니라고 발끈한다. 괄괄하고 화통한 상여자 박세리도 대전사람 아니냐며 우긴다. 그러다 누가 옆에서 송중기도 대전사람이지 않냐고 거들어주기라도 하면 어깨가 올라간다. 그뿐만인가요? 요즘 대세 손석구도 대전사람이랍니다. 글쎄 대전에서 회사를 운영했다네요. 구구절절이다. 누가 보면 손석구 최측근인 줄 알겠다. 웃기기도 하다. 대전에서는 그렇게 고향이 서울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서울에 온 뒤로는 대전 홍보대사인 것처럼 군다. 타국에 가면 애국심이 갑자기 상승한다는데 이런 기분이려나.
대전을 떠나보니 너무 익숙했던 대전이라서 미처 몰랐던 대단한 곳들이 눈에 띈다. 최근에 가수 성시경이 '찐맛집'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 백종원이 나온 걸 보았다. 백종원은 본인 가족이 예전부터 즐겨 찾는 맛집으로 대전의 한 중식당을 꼽았다. 이제 전국적으로도 얼마 남지 않은 화교가 운영하는 중식당이라고 했다. 빈말을 못하기로 알려진 맛에 까다로운 성시경이 멘보샤를 맛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맛있어서 미간을 구긴 거였다. 감격에 젖은 성시경을 보고 백종원은 팔짱을 끼고 믿고 먹으라는 식으로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성시경은 멘보샤, 관자튀김, 짜장면을 먹으며 다시 와서 전메뉴를 먹어봐야겠다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난 이곳을 가봤다. 심지어 똑같은 메뉴를 먹었다. 먹으면서도 화교가 하는 진짜 요릿집인지도 몰랐고 심지어 파는 곳이 흔치 않다는 관자튀김을 먹으면서도 안에 들은 게 관자인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멘보샤도 아무 감흥 없이 삼켰고 짜장면도 그럭저럭 무난하다고 느꼈다. 그저 지역에서 오래된 유명한 중국집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방송이 나가고 원래도 인기가 많았지만 이제 기다림 없이는 맛보기 힘든 식당이 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 식당이 서울에 있었다면? 당장 버킷리스트에 추가했을 것이다. 밍밍하다고 여겼던 관자튀김을 먹으며 역시 서울에서 오래된 맛집이라 심심한데도 맛에 깊이가 있다며 입맛을 다셨을지도 모른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늘 옆에 있어주는 가족이나 연인에게 잘 대해야 한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구절이다. 맞다. 익숙해지면 뭐든 당연하게 여겨진다. 일상이 되면 환상이 깨진다. 광안대교를 매일 보는 부산사람들은 더 이상 야경을 보고 가슴이 울렁대진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함부로 알 순 없겠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미인 김태희를 매일 보는 비도 가끔은 심드렁해지지 않을까? 출퇴근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보고 무심히 지나치는 나처럼 말이다.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수백 장 찍었던 나를 보는 뉴욕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덧 서울살이 십 개월 차. 서울과의 허니문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지하철에서 한강이 보이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나도 종종 핸드폰 화면을 본다. 지하철 어플 없이는 환승도 하지 못했던 내가 주요 역이 몇 호선에 있는지 대충은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기이한 행동을 하는 지하철 빌런들을 보며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곧 시선을 거두고 모른 척한다. 스무 살 때 서울로 놀러 갔다가 길에서 마주친 한 연예인을 두고두고 기억했던 내가 이제 성수동에서 연예인을 봐도 순간적으로 신기해할 뿐 금세 잊는다. 왜 신혼의 '단꿈'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낮잠을 자다 꾸는 꿈처럼 짧고 달콤하기 때문이다. 왜 길면 지루해질까. 사람의 마음이란 어째서 이다지도 간사할까.
얼마 전 미루고 미뤘던 옷장정리를 했다. 옷 욕심이 심한 나는 옷을 사는 데 돈을 제일 많이 쓴다. 요새는 좀 줄여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힘들긴 하다. 옷장이 미어터지려고 해도 옷을 계속해서 사는 건 일종의 마약에 중독된 상태다. 새 옷을 살 때 새 기분도 얻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끊을 수가 없다. 모델이 입은 옷을 입으면 나도 더 예쁘고 세련된 나로 변하는 것 같다. 정리를 하다 옷더미에 파묻혀있던 셔츠를 발견했다. 혹해서 샀는데 몇 번 입지 않고 방치해 둔 옷이었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번뜩 가지고 있는 바지와 모자에 매치해 보니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이렇게 맵시가 철철 흘러넘치는데 왜 이 옷의 진가를 몰랐나. 바보 같은 나여. 다가오는 휴일엔 이 옷을 입고 놀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셀카를 찍었다. 굳이 새 옷이 아니어도 들떴다. 새 기분을 얻는 데는 새 옷이 아니라 새 마음이 필요하다. 가지고 있던 옷을 새롭게 입는 마음으로 대전을, 서울을 바라보면 다시 나를 둘러싼 풍경이 생경해질 테다. 지금 어디에 살든 관광객이 된 기분으로 살기! 그럼 지겨웠던 동네 음식점도 유명 맛집이 되고 집 앞 하천도 센느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