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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04. 2021

첫사랑


무심코 찾아온 봄바람에 춤을 추는 나비를 보았어.

 

참 예쁘더라. 나비는 내 곁을 맴돌았어. 토성의 고리처럼 말이야. 기억도 희미하게 나지 않는 날개의 무늬를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봄이 다 가버렸지. 나비는 잠시 머리 위에 앉아 머무르곤 이제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멀리 날아가 버렸어. 급히 쫓아가 봤지만 어느새 사라져 있었어.

 

그리고 어느 날, 내 정수리에는 작은 새싹이 돋아났어. 그동안 몸 어딘가가 자꾸 간질간질하다 싶더니 이 녀석 때문이었나 봐. 모자로 가릴 수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숨길 수 없었어. 새싹은 머릿속으로 뿌리를 헤집고 내려가 신경 곳곳을 타고 온몸을 감쌌어. 영양분을 쭉쭉 빨아들였지. 마치 성장기의 남자아이 같았어. 방금 먹었는데 또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는 거야. 어쩔 수 없이 난 배부른 배를 움켜쥐고 억지로 음식을 먹었어. 새싹은 햇빛을 원했어. 햇빛을 충분히 쬐어줘야 줄기가 튼튼해지고 잎이 싱싱해진대나 뭐라나. 덕분에 매일 7시간씩 일광욕을 했지. 햇빛을 차단한다고 선크림도 바르지 못한 채 눈부신 태양을 바라봐야만 했어. 피부는 이미 그을리고 새까맣게 물들었어. 비가 오는 날에는, 수분 섭취를 위해 우산도 쓰지 않고 몸을 적셨어. 새싹은 기분 좋은지 머리에서 꿈틀거렸어. 말도 못 하게 추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렸어. 새싹이 가자는 곳으로 가고, 새싹의 기분을 눈치껏 파악하고, 새싹이 보는 곳을 함께 보았지. 녀석은 나의 정성으로 무럭무럭 자라 줄기를 뻗고, 잎을 만들고, 봉오리를 맺었어. 그리고 마침내 꽃을 피워냈어. 꽃은 정말 아름다웠어.


나비가 다시 찾아왔어. 잔뜩 긴장하게 되더라. 나비는 머뭇거리더니 나의 꽃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어. 짜릿했지. 꽃도 행복한지 흥분해서 달콤한 향을 주체 없이 뿜어댔어. 마침내 나비는 꽃에게 완벽히 자리 잡았어. 사람들은 우리를 부러워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나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황홀한 나날들이었어.

 

나는 나비가 다시 떠나갈까 무서워 꽃의 상태에 더욱 신경 썼어. 영양 섭취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일광욕과 수분 유지에 최선을 다했어. 꽃의 기분을 위해 좋은 음악도 쉬지 않고 들었어. 흙에 좋다는 비료까지 먹기도 했지. 하지만,

 

결국 꽃은 시들었어. 꽃잎이 떨어졌어. 잎도 쪼그라들었어. 줄기도 힘없이 축 늘어졌어. 어떤 방법을 써도 꽃은 되살아나지 못했어. 속이 무너졌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나비도 속상해했어. 꽃의 장례식에 함께 참석했지. 나와 함께 펑펑 울었어. 이런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그리고 나비도 떠났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던 거야. 내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원래 꽃이 있던 자리에 뻥 뚫린 구멍뿐이더라.

나는 정수리에 흙을 채워 넣으며 다짐했어.

다시는 나비를 보지 않겠다고.

다시는 머리에 씨앗을 심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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