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경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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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사장 위 그어놓은 선이 물결에 지워지듯, 기억 또한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닳고 퇴색할 텐데.
이를테면, 어릴 적 햇빛이 부서지는 강가, 웃던 친구의 얼굴, 따뜻한 손끝. 세월 지나 떠올릴 적마다 색은 바래고, 또 얼마간 녹이 슨다. 이처럼 무슨 기억도 영영 상태 그대로 못 박힐 수야 없으며, 도리어 매 순간 스스로를 다시 그리는 모양인데.
그와 같이 기억이란, 파편적 저장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맥락’에 가까우리라. 가령, 언젠가 어느 날 느꼈던 감정은 언제고 또다시 변형되고, 계속해서 새로이 조각되는 양으로. 매 오늘마다 어제의 장면을 다시 읽고, 다시 짜는 셈이겠으니. 마치 바닷물이 해변을 덮었다 물러나며, 매번 새로운 자취를 남기는 양으로.
‘나’라는 경계(존재론)도 이처럼 기억과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텐데. 그리하여, 과연 나는 누구인가? 그는 무얼 겪는가? 물음에 답할 적 그는 언젠가의 기억을 호출하겠으나, 그 기억조차 새로이 구성하고자 시도하는 작동과 아울러 자리할 따름일 양이다. 틈새마다 새어드는 시간의 흔적과, 변형된 감정이 이미 쌓여 있는 그 위에 여전하게도 또다시 쌓이는 중이겠으므로.
여느 장면들을 떠올릴 수도 있으리라. 낡은 앨범을 꺼내 들여다볼 때, 사진 속 그가 어제 보았을 적보다 더욱 아득하다 느껴지던 평상적인 어느 순간. 그건 과거라는 ‘영토’가 이미 서로 다른 ‘오늘[들]’에 의해 늘 재편되고 있는 까닭 아니던가.
시간 속엔, 기억의 윤곽도 개인의 경계도 명확히 남지 않는바. 그저 자취는 저기 저 무수한 왕래가 ‘어떠했는지’ 정도만 남길 뿐이리라. 때마다 확인되는 건, 부단한 변화 속 매번 임의로 엮인 기억의 단편적 순간들이라는, 정신적 임시 가상에 불과하겠으니.
그렇게 삶은, 끊임없이 새로 그려지는 아슬아슬한 경계로 구성되는 모양이다. 경계 이전이든 너머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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