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타자와의 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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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저토록 무수한 타자와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예의 충돌에 의한 균열과 또 그로 인한 간극을 동반한다. 접촉은 우리와 타자가 (본의 아니게라도) 서로 다가선 결과이나, 그리 다가서는 과정 자체는 언제나 완전히 틀어진 불일치만 보장하는 모양이니. 따라서, 다름 아닌 바로 그리 다가서던 길 위에서야말로 우리는 끝내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그처럼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절감하곤 할 양이다.
명쾌하게 접촉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 영영 비틀어지는 거리감은, 접촉의 필연적 부산물이자 타인과의 관계에서 도무지 소거하려야 소거할 수 없을 영원한 그 자체 정체성이리라. 가령 우리가 타자를 온전히 이해한다 스스로 자신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그토록 온전히 속일지언정, 기실 그 이해라는 상호 간 착각조차 오독과 오해의 끊임없는 교환 속에서만 어우러지는 오인의 한 종에 불과하겠으므로. 언어는 늘 어긋나고 감정은 항상 엇갈리며, 그리하여 의도는 단 한치도 출발한 그대로 자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엔 언제나 틈이 자리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틈이 거듭 일구어 도출해 내는 저기 아득한 간격이야말로 관계의 본질이리라.
예컨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서로에게 닿으려 애쓰지만, 그리 서로 간 완전한 도달은 그저 망상에 불과할 터다. 그리도 자랑스럽게 사례로 거듭 출몰하곤 하는 저기 저 사랑이라는 상태는 예의 간극을 메우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간극을 감수하고 영원히 그 간극 너머 서로에게 다가가는 상태에 다름 아닐 모양인데. 이는, 저기 저 이상 속에서만 망상적으로 자리하고자 애쓰는 상상 너머의 완벽한 이해를 전제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서로에 관한 이해를 더욱 온전하게 하고자 다가서는 <노력>에의 과정 자체 아니던가.
간극은 때로 절망을 낳고, 또 때론 새로운 가능성을 틔우기도 하는바. 어쩌면 간혹은 우리가 타인을 완벽히 소유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데서 저기 저 익숙한 절망이 비롯되어 엄습하기도 했더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 간격 덕택에 타인을 향해 계속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이는 등, 닿으려는 몸짓을 이어 시도할 수도 있는 셈이다. 만일 간격이 없다면, 다가서는 운동 또한 아울러 사라지고 정체되며 그저 맨송맨송하고 단일한 동어반복의 세계 속으로 각자의 세계가 함몰되지 않겠나. 삼투가 끝나 평준화된 세계 따위가, 어떤 운동도 생명도 없는 정지 상태의 세계 따위가 바로 그런 이상의 현실로서의 한계 아니겠는지.
고로, 삶이라는 유속은 이러한 타자와의 접촉들 내부에서 그리 매번 틀어지는 까닭에, 나아가 그 틀어짐을 통해 발견한 간극을 끝내 메울 수 없는 까닭에, 그에 비롯하여 각자의 유속을 더욱 다듬는 과정 아니던가. 그처럼 우리는 예의 무수한 간격들을 안은 채로, 이를 감수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균형을 잡고, 서투른 손짓을 건네며, 간신히 다리를 놓아가며 나아가는 중일 모양이다. <누구도 예외 없이>.
그렇게 보면, 끝내 모든 인간은 모조리 간극에서만 거주할 텐데. 설령 누군가 스스로 간극 밖으로 나와 있다고 어찌나 호소하며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얼마나 차분한 연출과 함께 주장하던 간에, 그 주장조차 오해된 함의 속에 재차 간극을 낳고는 그 주창자로 하여금 예의 저 얄팍한 간극 속에 영원히 갇혀 살게 하지 않겠는지. 그 누구라도. 그러니까, 완전한 이해가 결코 아닌, 끝없이 불완전한 운동 속에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바로 이 각자의 유속에 갇혀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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