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언어, 흘러내리는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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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세계를 붙잡는다. 요컨대 저 흔한 언어에 굳이 매달리지 않고선, 어느 세계도 형용되기 어려운 바도 사실 아니던가. 이른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구문 또한 그 자체 언어로 진술된 열매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무슨 무슨 작품이 그 자체로 언어를 경유하지 않았다 주장하더라도 당 작품을 매개하여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 그 작품은 이미 하나의 약속된 기호가 되는 셈이고, 따라서 예의 작품은 그 자체로 벌써 하나의 (새로운) 언어 기호인 셈이다.
또한, 이를테면 돌을 가리키며 “돌”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유속 내부 무언가를 잠시 엉겨 세운다. 물결을 가리키며 “강”, 숨을 가리키며 “생명”, 정신을 가리키며 “마음”이라 부를 적 우리는 흐르는 세계의 일순간을 가로채어 그 위에 기호의 덫을 씌우는 셈 아니겠나.
그처럼 언어는 운동하는 세계를 붙잡기 위한 틀 정도로 작동하곤 할 텐데. 저기 저 틀이 과연 완전할는지 보면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 언어는 그것이 전달하려는 바로 그 대상에 비하면 언제나 과잉 혹은 결핍의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겠으니. 가령 하나의 단어는 저 무한한 복잡성을 담기엔 너무 좁고, 동시에 아주 쉽사리 번지곤 하니까. 예컨대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르며, 같은 순간에도 무수히 다르게 엇갈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 표현하고자 할 적마다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혹은 그럴 적에 매개 삼는 걸 언어라 정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어쨌거나 인간이 가진 인식의 그물은 언어라는 틀 없인 조금도 엮일 수 없겠으므로.
허나 여기에도 매번 저기 익숙한 결정적 결함이 깃드는바. 언어로 묶인 순간 우리는 무언가 잃어버린다 느끼기도 하겠으니. 말하자면, 진정 경험 그 자체는 언어로 옮겨질 수 없는 모양으로. 제아무리 정교히 묘사해도 그건 묘사의 덧칠일 뿐, 사건 자체가 될 순 없겠으니. 내 마음을 전하려는 기호는 그런 내 마음을 가리킬 뿐 여기 이 마음 자체를 예의 기호에다 완벽히 이식할 순 없는 것 아니겠나. 따라서 언어는 우리를 연결하는 동시에 이를 위한 임의적 틀로서의 한계 안에서만 통한다. 언어가 없다면 우리 정신은 오해와 오인의 방식으로조차 여느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겠으나, 그리 언어로 묶이는 순간마다 또한 분명히 결정적으로 유실되며 새어 나가는 무언가 있을 까닭에.
그처럼 언어는 끝끝내 유속을 붙잡고자 애쓸 적 친숙하게 작동하는 그물임에도, 그에 아울러 예의 유속을 표지한다는 명목으로 바로 그 유속을 도리어 놓쳐버릴 명분으로서의 저 간격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저 틀 안의 세계를 겨우겨우 읽어냈다 믿으면서도, 또 언제나 그 틀 너머로 뻗어나가고자 그토록 애를 쓰다가도, 다시 때마다 그리 그 뿌리부터 저 틀 또한 아울러 의심하며 저리도 흔들리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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