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호원, 남경대학, 전화국, 중앙반점
난징은 중국 고대, 근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장소예요. 곳곳에 천년도 넘은 역사의 흔적과 기록이 남아 있어요. 이곳 거리마다, 오래된 낡은 건물과 골목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흔적도 남아 있어요.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운동가들은 각자 흩어져,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활동했어요. 제가 먼저 찾은 곳은 후지아화위앤(호가화원,胡家花园), 지금은 위앤(우원,愚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원입니다.
골목을 따라 들어서자, 담장 너머로 보이는 붉은 벽돌과 작은 창문, 그리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아기자기한 정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겉보기에는 웨딩 촬영과 인스타그램 사진을 찍는 사람들, 관광객, 지역 주민들로 북적이지만, 이 평화로운 공간 속 한편에서 김원봉 님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거처하며 몰래 정보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작은 방 하나, 돌담 하나, 아무것도 아닌 듯한 정원 구석이 그들에게는 나라의 운명을 품은 공간이었겠죠. 근처에 구와관사 古瓦官寺라는 불교사원이 있어요.
이곳에도 생활했다고 합니다. 한 곳에서 정주하기는 어렵고 이곳저곳 옮겨 다닐 수밖에 고단함이 느껴지네요.
그다음으로 찾은 곳은 난징전화국 구로우분소(南京电信 鼓楼分所)입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우뚝 선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서면,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오래된 사무실 건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1934년, 군사 훈련을 마친 정율성은 이곳에서 일본인 전화를 도청해 의열단에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평범한 건물 하나, 전화기 한 대가 독립운동의 중요한 힘이 되었고, 역사를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네요. 건물 앞에도 못 가고 주차 차단기 앞에서 사진만 찍었어요. 건물 앞에만 가보겠다는 동구 쌤의 호소도, 서 쌤의 설득도 경비아저씨에게 통하지 않았어요. 너네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나는 모르겠고.. 경비아저씨 임무가 경비니 어쩔 수 없죠.
난징대학(구 금릉대학金陵大学,1949년에 난징대학으로 개명)에 갔어요. 중국은 어느 학교이든지 사전 승인과 예약이 있어야 교정에 들어갈 수 있어요. 위에는 정책이 있고 밑에는 대책이 있는 중국이라, 학교 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 입장이 가능해서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면 잠시 쉬었어요.
고풍스러운 건물, 담쟁이로 뒤덮인 오래된 벽, 높게 걸린 창문을 보며, 여운형, 서병호, 김원봉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며 조선혁명당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숙연해져요.
단순한 강당처럼 보이는 공간도, 그 안에서 이루어진 회의와 결단 하나하나가 민족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순간이었음을 느낄 수 있어요.
1933년 전후로 김구 선생님과 장개석(장카이쓰)총통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했다는 중앙반점입니다.
여기는 주은래를 비롯한 유명 정재계 인사, 연예인, 예술가들이 모여 교류했던 장소로도 유명해요.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와 가구가 그때를 상상하게 합니다.
벽에는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이 붙어있고 조선국부 김구라고 표시한 김구 선생님 사진도 있어요.
중국에서 다른 나라지만 국부라는 호칭을 썼다는 게 인상적이에요.
이렇게 광복절 주말에 호가호원, 난징전화국, 난징대학, 중앙반점을 걸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봤어요.
1919년 전까지, 3월 1일은 평범한 하루였어요. 지금 우리에게 이 날은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할 만큼 중요한 날이에요. 당시 원각사 옛터에 십 층 석탑이 남아 있어 파고다공원이라 부르는 작은 서양식 공원은 삼일운동 발원지로 서울시 주요 문화 유적이에요. 탑골 공원의 오래된 나무, 작은 벤치와 잔디밭이 민족의 외침을 시작한 공간이네요. 우리가 무심코 스쳐가는 길, 바라보는 건물, 공원 하나하나도 다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삶과 투쟁의 흔적이 남은 공간이에요..
중국 땅에서 구한말부터 광복까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크고 작은 노력을 기울였던 독립운동가들이 생활하고 모여 활동했던 이 소중한 공간과 시간을 기록한 책, <독립유적지 동행하기>,
종이는 누렇게 변하고 잉크색은 바래 희미해지더도, 그분들이 남긴 의미와 흔적은 오래도록 짙게 남아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