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주관화의 필요성

가끔은 역발상이 필요하다.

by 오경수
sp.jpg 에곤 쉴레(Egon Schiele,1890~1918)의 자화상

우리 사회는 잘난척하고 허세 부리는 사람보다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을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전자와 후자의 태도 차이로 인한 잠재력 때문일 것이다. 전자는 잘난척하고 허세 부리기 때문에 자존감과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겠지만, 자기애가 너무 과해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일을 끌고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전자는 발전 가능성이 낮다. 이미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남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까?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후자는 겸손하기에 남이 칭찬을 해도 거만해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발전에 자극제로 받아들인다. 또한 타인과 의견 충돌이 있을 때도 전자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전자는 자기주장대로 일을 끌고 가려 하겠지만,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은 의견 충돌로 인해 타인과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겸손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교육을 받았다. 요즘엔 자기 객관화라는 단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자기 객관화라는 단어를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니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다"라고 나와있다. 그리고 객관화는 "자기에게 직접 관련되는 사항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거나 생각하는 일"이라 나와있다. 즉, 자기 객관화란 "자기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거나 생각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겸손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담론으로 인해 자기 객관화에 굉장히 신경 쓰고 강조한다. 자기 객관화를 해서 자신을 돌아볼 경우 자신의 단점들을 발견할 수 있고, 자신의 장점들은 오히려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신을 더욱 발전시키고, 성장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기 객관화로 인해 자신을 남에게 맞추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객관화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보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타인들에게 동일자화하게 하는 계기가 아닐까?


한국 사회에서는 어릴 때부터 자기 객관화를 체화시킨다. 그래서 남들과 다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인식하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되었다. 대부분의 남아들이 장난감 칼을 가지고 노는데 한 남아가 인형을 가지고 논다면 칼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다른 놀이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놀리거나 자신들처럼 장난감 칼을 가지고 놀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에는 타자가 될 것이고, 수락할 경우에는 스스로를 동일자로 만들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수가 틀리고 다수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삼자의 시선으로 보기에 남들과 같은 사람 혹은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나의 잠재력이 남들과 다르다고 그것을 버려야 할까?


위에 그림을 그린 에곤 쉴레는 고흐와 같은 화가들과 비교하면 빨리 성공하고 인정을 받은 화가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예술로 성공하기 전에는 포르노그래피나 그리는 성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만약 에곤 쉴레가 비난을 못 이겨 자기 객관화를 통해 시대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에로티시즘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에곤 쉴레는 자기 객관화보단 자기의 주관을 살려서 센셔이셔널 한 그의 예술을 완성했다.

아비뇽의 처녀들.jpg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

현대미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은 현재 ‘큐비즘(Cubism)’의 최초의 시도이자 현대미술에서 선구적인 그림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 그림을 완성한 당시에 피카소의 친구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사창가의 여자들을 그린 그림이 관람자가 보기에 불편하고 당시에 큐비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기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출품을 말렸다. 하지만 나중에 이 그림이 알려지고 피카소는 엄청난 찬사와 악평을 모두 듣게 된다. (심지어 조르주 브라크도 그의 작품을 오마주로 큐비즘 작품을 만들었다.) 피카소 만약에 자기의 주관을 살리기보다 객관화에만 집중했다면 큐비즘이라는 사조를 융성시킬 수 있었을까?


자기 객관화는 우리 사회에서 필수 덕목일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왜 자기 객관화를 비판하고 있을까? 나도 매일 자기 객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왜 그럴까? 내가 비판하는 부분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행위가 아니라 맹목적으로 타인에게 맞추며 자기의 정체성을 변질시키는 행위이다. 우리 모두가 다른 부모에게 다른 시간에 태어나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다른 사람이 될 텐데 왜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수에 편입되려고 애를 쓸까? 우리는 타자로 취급받기 싫어서 스스로의 잠재력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이 시대의 피카소나 에곤 쉴레가 될 수 있는데,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이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잠재력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


내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자기 객관화와 자기 주관화의 공존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자기 객관화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가끔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주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주관화는 남들을 신경 쓰지 말고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이다. 자기 객관화는 채찍처럼 나를 때리고 뛰게 하지만 나를 달래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자기 주관화 같은 당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남들이 다 나를 싫어하고 비난한다면 나를 사랑해주고 칭찬할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을까?


최근에 복수전공 문제로 부모님과 마찰이 있었다. 이 마찰로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왜 나는 남들처럼 하나의 전공으로 쭉 가지 못할까? 왜 나는 내 전공을 버리려고 할까? 와 같은 생각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해보도록 노력했다. 나 아니면 누가 이런 도전을 하겠는가? 어떻게 또 도전을 하지? 나 정말 대단하다! 난 정말 과감하다! 와 같은 칭찬들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주사위는 굴려졌고 나는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러니까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나의 태도밖에 없다. 나의 태도만 바뀌어도 이렇게 기분이 바뀌는데 내가 왜 나를 남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첫 번째 그림의 작가인 에곤 쉴레는 평소에는 말 수도 적고 굉장히 수줍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위의 그림과 같은 도발적인 포즈와 눈빛은 평소의 그에게서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자아도취적인 자화상이다. 에곤 쉴레 야 말로 자기 주관화를 통해 자기를 사랑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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