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될 거야
지금은 중간고사 기간이다. 지식론 시험은 수요일에 봤으니 이제 4과목 남았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지 않고, 이상하게 시험에 대한 걱정이 없다. 개강 이래로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해서 그럴까? 3월 초에 개강한 이래로 나는 매일 철학을 공부한 것 같다. 심지어 코로나에 걸려서 집에서 쉴 때도, 틈틈이 공부를 한 것 같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했을까? 열심히 한다고 뭘 이루는 것도 아닌데. 아마 내가 좋아서 공부했을 거다. 주어진대로 생각하고 이해하는 공학을 공부하다가 내 사유를 키우는 철학을 공부하니까 더 보람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태어난 지 26년 만에 드디어 주체가 된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작년에 독서를 시작하고 사색에 빠지며 시작된 것 같다. 그땐 그냥 책을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지금도 재미있지만 그때는 철학책을 읽는 내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세상에 어떤 공대생이 미셸 푸코 책을 읽을까 하는 생각에 나르시시즘에 빠졌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내가 진짜 대단한 줄 알았다. 작년 9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 혼자만 보는 글이었지만, 나는 자주 읽어보며, 스스로에게 취했다. 감시와 처벌을 완독 한 것도 나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그 저서를 읽고 그것을 사회문제와 연관시켜서 비판적인 글을 쓰는 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철학에 더더욱 빠지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면서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4학년 1학기부터 철학을 복수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대학원까지 마치고 학자로 사는 내 모습을 그리며 꿈을 키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 제동을 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내가 미셸 푸코가 된 마냥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22년 3월 2일에 철학 전공으로서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너무 기대가 되었다. 맨날 혼자만 되새기던 용어들을 강의시간에 듣게 되다니.. 드디어 내가 원하는 수업을 듣는구나... 하며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등교를 했다. 첫 주는 오리엔테이션 주간이라 대부분 강의를 진행하지 않고 간단하게 끝났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도 나의 사유를 뽐낼 생각에 본 수업이 더더욱 기대되었다. 그리고 2주 차부터 진짜 강의를 시작했는데, 당황스러웠다. 거의 모든 강의가 토론식으로 진행되었다. 기존에 듣던 공대 강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님이 혼자 강의하셔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험기간이 아니면 딴짓을 하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모두가 수업을 집중해서 듣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사유로 교감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나에게 너무나 낯설었다. 하지만 나도 그들과 동일 자화 되려고 많이 노력했다. 강의 전에 예습해서 강의 때 토론에 참가하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내용이 쉬우니 그럭저럭 잘 꼈던 것 같다. 하지만 2주 차, 3주 차로 갈수록 따라가는 게 버거워졌다. 분명 나는 매일 자정 넘어까지 공부하는데, 강의에서는 입 다물고 앉아있기만 했다. 얼마나 말을 안 했으면 교수님이 따로 생각을 물어보셨을까? 대체 나와 그들은 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내가 갑자기 철학과로 왔으니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은 알지만, 나는 그 격차를 줄이고 싶었다. 같이 강의를 듣는 학우로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문적 동지로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 걸음을 그들의 보폭에 맞출수록 내 가랑이만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좌절하며, 주눅이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는데, 막상 진짜 철학과에 오니 나는 동일자가 되기 어려운 타자 중에 타자였다. 어디 가서 철학을 공부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현타가 좀 심하게 왔다. 과연 나는 대학원을 가도 될까? 철학을 해도 될까? 학부과정도 어려워하는데 나는 자질이 없는 것이 아닐까?
철학과에서 강의를 듣는 소속감은 아주 만족스럽다. 모든 강의가 재미있고, 늦게 온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인생은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기가 끝나면 성적이 나오듯이 결과도 중요하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즐기고 있지만 과연 미래에 결과도 즐길 수 있을까? 맹목적으로 학과와 학우들에게 나를 맞춰서 동일자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이전처럼 내가 가던 길을 혼자 묵묵히 가야 할까...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랑 내가 배우는 분야가 다소 차이가 있다 보니 나를 학교에 맞추는 느낌이다. 그래서 요새 글도 잘 안 나온다. 전에는 내가 파고 싶은 분야를 열심히 파다 보면 영감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맹목적으로 학교 공부를 따라가다 보니 글이 나오지 않는다. 학교에서 내가 모르던 것을 많이 배워서 좋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철학을 하는 입장에서 꼭 필요한 부분들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진심으로 내가 잘됐으면 좋겠다. 성적이 낮아도 좋으니 작년처럼 즐겁게 자신감 있게 철학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