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지만 지난했을 추억이, 고달팠지만 아름다웠을 많은 일들이 우리 삶 곳곳에 묻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 어느 날, 외출 전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아빠는 만족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셨다.
“한 때 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아빠를 쳐다보던 때가 있었다.”
“푸핫. 내가 아빠를 닮아 자화자찬이 심한 거였네.”
“진짜라니까.”
말수가 적은 아빠가 갑자기 드러낸 자부심에 나는 웃고 말았지만 그 말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봐도 아빠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아빠는 그 젊은 시절이 그리우셨던 것일까? 한 동안 거울 앞에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시고 문 밖을 나서셨다.
젊은 어느 시절 한껏 멋을 부리고 사람이 북적이는 압구정, 명동 그 어느 거리 한복판을 위풍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언가가 될 희망, 무언가를 가지게 될 기대를 품고 미래를 그리고 있는 젊은 아빠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렇게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며 문득 지금의 나보다도 젊었을 그때 아빠의 꿈과 희망은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진다. 아빠는 아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었을까? 멋지고 젊었던 우리 아빠는 나의 아빠가 되기 훨씬 전 그 시절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나는 병원에서 일하며 수많은 환자들을 간호했지만 그들을 간호하면서 그들의 건강하던 시절을 잘 알지 못했다. 환자가 입원하면 환자의 기본적인 정보를 확인해 기록하는 간호정보조사지에 적힌 직업과 나이, 가족관계, 사는 곳 등을 알았지만 그 한 사람의 인생, 꿈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질병을 얻어 병상에 누워 있기 전 어느 시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질병은 때론 사람을 위축되게 하고 나약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질병을 얻기 전 그 사람의 건강했던 시절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환자로서의 그들을 마주하며 그 모습을 그 사람의 전부로 인식할 때가 많았다. 환자 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질병을 마주하기 전 꿈꾸었던 꿈과 미래가 무엇이었을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분명 내가 간호했던 모든 분들이 질병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을 시절 분명 다른 삶과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병상에 누워계신 아빠의 쪼글쪼글한 손을 마주 잡고,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 진 아빠의 얼굴을 본다. 많은 꿈을 꾸었던 어느 시점의 젊었던 아빠가 그 시절보다 늙고 병든 모습으로 내 앞에 누워 있다.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계신 아빠의 다리는 근육이 퇴축되어 매우 얇아졌다. 나는 아빠의 가녀린 다리를 닦으며 아빠가 멋지게 차려입고 문 밖을 나서던 그날을 생각했다. 젊은 시절 아빠의 꿈을 다 알지 못하는 나는 아빠가 꿈꾸었던 그 많은 꿈들을 지금의 아빠가 다 이루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빠의 쇠약해진 몸과 나이 든 얼굴을 보면서 아빠가 지나온 세월의 과정 속에 행복했지만 지난했을 추억이, 고달팠지만 아름다웠을 많은 일들이 아빠의 삶 곳곳에 묻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크고 훤칠했던 그날의 아빠와 내 앞에 누워계신 아빠가 대비되었다. 누군가는 지금의 아빠의 모습으로 아빠라는 사람을 정의하고 기억하겠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멋지고 건강했던 아빠가 있음을 아빠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다. 늘 멋쟁이였던 우리 아빠! 그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내가 그런 아빠의 모습을 꼭 기억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우리의 아름다웠던 때를 함께 기억해 준다면 우리에게는 그 기억이 행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