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4. 반성문 - 엄마라는 이름의 횡포
불쑥 이상한 형체의 감정이 툭 튀어나와 그 모서리로 가장 보드랍고 연약한 아이에게 생채기를 내버렸다.
오늘 나는 아주 찌질하고 못난 행동을 했다. 둘째이자 막내인 우리 집 마스코트 딸아이를 협박하고(이제 너에게 아무런 간섭을 않겠다. 공부든 생활이든 네 맘대로 해라. 단,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에 대한 지원도 끊겠다. 문제집을 가져와라. 나는 그것을 버릴 것이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조롱하고(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핸드폰이나 해라.) 비난하고(너는 지난해에 책을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었냐. 나는 그 바쁜 와중에 30권도 넘게 읽었다. 너는 무식하다.) 그리고... 외면했다.(포화 같은 공격 속에서도 내 눈치를 보며 최대한 참고 견디는 착한 아이를 못 본 척했다.) 게다가 세상 가장 싸늘한 표정과 한숨으로 무시를 날렸다. 이제 겨우 중2인... 학교도 잘 다니고, 숙제도 스스로 잘해가고, 항상 긍정적이고, 속 썩인 적 한번 없는 아이에게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횡포를 놓았고, '이제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너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너의 친구들은 지금 많은 공부를 하며, 그것이 한국 학생들의 현실이다.'라는 정말 짜치는 논리를 내세우며 지금껏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양육한다며 잘난 체하던 내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었다. 괴로운 밤이다.
시작은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중 2가 될 딸아이가 마냥 놀기만 하고 심지어 하루종일 시답잖은(내 기준에) 유튜브나 보고 있으니... 한국에서 갖고 온 영어 문제집을 풀게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틀려 그때 내 마음이 배배 꼬여버렸고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었다. 어제는 수학 문제집을 풀라고 했고 내가 채점을 하겠다 하니 극구 자기가 하겠다는 게 아닌가. 오늘 아침부터 수학 문제집 채점을 했는지 물었고 이리저리 회피하는 딸이 또 못마땅했다. 사춘기라 해도 그렇지... 왜 저러나... 싶다.
나의 명분은 학습 계획을 위한 진단이었다. 나는 딸아이의 수준을 파악하고 학습량이나 방법, 사교육의 유무를 결정하겠노라고 했고, 딸아이는 왜 그걸 엄마가 결정하느냐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끝내 거부를 하지는 못했다. 오늘 하루 내내 몇 번을 물었다. 수학 문제집 채점을 했는지... 답이 없다. 그러고 나는 말했다. 영어 문제집 틀린 문제 중 정말 몰라서 틀린 것과 실수로 틀린 것을 체크해 보라고.. 그러니까 틀린 문제 다시 풀어보라는 얘기였다. 오늘은 영어 문제 틀린 것 풀어보기와 수학 문제집 채점만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었다. 근데 늦게 일어나 아이패드로 웹툰 보고 유튜브 보고... 중간에 내가 책을 읽자며 읽던 책을 들고 딸아이의 방으로 갔더니 이번엔 아이패드를 들고 내 방으로 가버린다. 나는 딸아이 방에서 오후에 읽던 책을 다 읽었고 딸아이는 눈치가 보였는지 아이패드 보다가 이내 집에 있는 만화책 시리즈를 들고 내 방으로 간다. 이상한 기류가 집안을 휘돌았다.
나는 사실 문제집 풀이에 불만을 제기하는 딸아이에게 어제 진지하게 왜 해야 하는지를 설명했고 아이가 이해를 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오늘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말투도 평시와 달리 살짝 경직되고, 아이를 향한 감시와 향후 내가 너를 응징할 것이라는 싸인을 온몸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슬그머니 넘어가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묻겠노라고... 하기 싫으냐고 안 할 거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그래서 나는 바로 알겠다고, 문제집 갖고 오라고, 버리자고, 너는 엄마의 관리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폭주해 버렸다. 아이는 문제집을 버리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문제집을 숨겼다. 나는 빨리 갖고 오라고 비아냥댔다. 저녁을 먹는데도 깨작거리면서 눈치를 보길래 먹지 말라고, 들어가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라도 한 숟갈 더 먹이려고 갖은 아양을 떨던 내가 남보다 못하게 건조하게 들어가라고 했다. 심지어 들어가는 뒤통수에다 대고 너는 엄마 밥 먹을 자격도 없다고 해댔다. 그것도 아주 치사한 말투로 말이다.
아이 교육에 대해 지금 나는 몹시 고민하고 있다. 딸아이만큼은 좀 잘 키워보고 싶은 욕심도 있고 뭣보다 큰 아이보다는 학습 면에서 분명히 나아보이기 때문에 이른바 결정적 시기에 필수적인 과업들을 잘 해내도록 지도하고 안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또 아이의 영혼을 속박하고 학습을 강요하고 무의미한 주입식 교육, 살벌한 경쟁의 트랙에 아이를 내몰아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든다. 큰 아이를 키울 땐 자신만만했다. 나는 큰 아이를 사교육의 노예로 키우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을 했고 공부나 성적에 관한 한 아이에게 어떠한 강요도 하지 않는 엄마라는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문제집을 사준 적이 없다. 공부하는 학원도 안 보냈다.(중2부터 고1까지 수학학원 제외-아이 스스로 찾아감) 고등학교 때는 수업 교재 정도 요구하는 것만 사도록 했고, 검사를 한 적도 없다. 예체능만 신나게 시키고 여행 다니고 캠핑 다니고 봉사 다녔다. 수능 1주일 전에도 캠핑을 갔고 수능 전날에도 큰 아이는 기타를 쳤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들을 키우는 멋진 엄마가 멋져 보였나 보다. 그렇게 되고 싶었나 보다. 한글도 모르고 겨우 제 이름, 그것도 성만 쓸 줄 안 채로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수업 시간에 먼산을 본다며 걱정했고(아마도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초 3 때는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평가(진단평가)에서 수학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그 나오기 어렵다는 '미도달'이 나온 적도 있었다. 초 5 때 담임 선생님은 교원평가를 걱정한 것인지 완벽주의자였는지 자신의 학급에 소위 부진아가 나와서는 안된다며 나에게 문제집이라도 사서 풀릴 것을 강권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교육관이나 신념이라도 있는 듯이 아이의 속도와 흥미를 존중해 달라는 교육학 개론에 나올법한 주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새파랗게 어린 학부모가 아무것도 모르고 저런다며 코웃음을 치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 큰 애는 지독한 독서광이었고, 영화광이었고, 피아노를 잘 치는 내 아이로, 학생으로 자랐다. 중 2 때는 진로 선생님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갈지 모른다고 해 자기 스스로 집 앞 수학 학원을 찾아갔고 마침 오픈하는 학원이어서 아이를 받아준 그 학원 선생님 덕(?)에 중3에 성적이 많이 올라(반 21등에서 9등으로) 어찌어찌 인문계 고등학교는 갔다(게임개발과 가 있는 특성화고를 가겠다 했을 때도 그러라고 했는데 결국 스스로 인문계를 선택했다). 고등학교에 간 아들은 성적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학교 생활과 엄청난 양의 독서, 문화생활(영화, 음악. 심지어 나는 집에 pc방을 차려 주었다. 집 밖은 위험하니까..)로 다져졌고 정말 공부를 안 한 것 치고는 멀쩡한 고등학생이 되어 그럭저럭 대학도 갔다.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하게 해 주고 학습 강요를 하지 않은 부모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기특했다.
다시 딸아이 얘기로 돌아오자면, 이런 오빠의 성장 스토리와 가풍(?)을 알고 있는 딸아이가 왜 저에게만 문제집을 풀라고 하냐며 불만을 제기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논리가 짜쳐서 나는 '여자 애가 공부 못하면 큰일난다'고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농을 가장한 발언이었지만 사실 속마음은 이 사회에서 무능한 남자보다 무능한 여자의 삶이 더 고달픈 것은 사실이니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야 함'을 이해시키기 위해 인생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하여 길게 길게 연설을 했다. 오빠를 유니크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엄마가 놓친 부분이 있고 너에게는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고 살짝 신파스럽게도 어필했다. 딸아이는 이해는 되는데 공감은 안된다는 애매한 말을 남겼고 결국 오늘의 사달이 났다. 운동을 갔다 오니 자는 건지 자는 척하는 건지 이불속에 있는 딸을 또 한 번 외면하면서 옹졸한 내가 한심하다.
나의 이중성을 고백하자면.... 아들은 되는데 딸은 안된다. 공부 못하는 아들은 괜찮았는데 딸은 안된다. 왜일까... 아들은 공부는 못했지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뚜렷했고, 공부를 잘해본 적이 없어서 기대도 없었다. 근데 딸아이는 사실 못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 성적이 아무 의미 없지만 뭘 시켜도 항상 우수하게 잘하는 아이여서.. 그 '뭘'에 공부를 넣고 싶은가 보다. 딸아이 성향 상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강경하게 학습을 관리하면 분명 따라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선을 차마 내 스스로는 못 넘겠다. 그건 강요니까... 나는 학습 강요하는 엄마는 안되고 싶으니까... 아이의 자발적인 학습의욕이 동기가 되어 마지못해 내가 지원을 하는 그런 그림이면 좋겠나 보다. 근데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문제집 풀기 싫다고 공부 재미없다고 했다. 내가 이것을 받아들여야 할까?... 남편에게 긴히 의논할 것이 있는데 애 없을 때 통화하자고 메세지를 남겼다. 남편은 내내 아이가 원하는 것만, 원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만 해주라고 했다. 또 그렇게 반응하겠지... 근데 그게 맞나요?
내 잘못도 크다. 한국에서는 뉴스와 영화 외엔 폰이든 뭐든 본 적 없는데 하노이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노예가 되면서 나부터 집에서 내내 폰을 봤다. 그러다 공포가 밀려오면 디지털 디톡스를 명분으로 내 폰을 끄고 아이 폰도 빼앗았다. 그러면서 나는 책을 보자고... 발란스를 찾아야 한다고 바둥거렸던 것이다. 아이가 나에게 '내로남불'이라 했던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반성한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겠다.
아이의 생각과 감정과 성장을 존중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근데 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버렸고 아이에게 바닥을 보여주고 말았다. 부모가 존경스럽지 않을 때, 얼마나 절망하는지는 나도 겪어봐서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
일단 이 밤이 지나면 아이 마음에 밴드라도 붙여줘야 할 것 같다. 사과해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문제집은 어쩌나...
누가 답 좀 주세요...ㅜㅜ
잠이 안 오는 쓸쓸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