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야 <샬롯 졸로토 글/애니타 로벨 그림>
여기 집안 구석구석 사방을 뒤지며 엄마의 찰나를 찾는 아이가 있다.
한 손에는 엄마가 선물해 주었을 애정인형을 꼭 쥐고 말이다. 이쪽 테이블, 저쪽 책상, 그쪽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엄마의 사진들, 책장에 꽂힌 사진첩을 한 장씩 넘겨 가며 빛바랜 시절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기쁨으로 외친다.
‘우리 엄마야’
아이는 가장 먼저 손뜨개 이불을 덮고 옹알이를 하고 있는 아가야 시절의 엄마를 찾는다. 자신과 꼭 닮은 인형을 달고 다니는 꼬마아가씨를 찾고, 추운 겨울 빵모자에 체크무늬 외투를 걸친 소녀를 찾고, 붉은 꽃무늬를 입고 여러 남정네들에 둘러싸인 아리따운 여성을 찾는다. 눈도 까맣고 머리도 까만 여대생을 찾고, 흰 꽃처럼 환한 드레스의 신부를 찾고, 한껏 멋을 낸 모자를 쓰고 아빠의 팔에 안겨 있는 아내를 찾는다. 베란다 앞에서 푸른색 숄을 걸친 배가 불러오는 여인을 찾고, 어린 아기를 안고 미소 짓는 눈 퀭한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 기쁨으로 외친다.
‘나의 시작이야’
그림책 장면 하나하나가 정물화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무생물이 아니라 Still life, 어떤 여성의 한 시절을 아름답게 정지시킨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그림 속의 여성은 정말 이쁘다. 이는 아이가 자기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짐짓 반할 정도이다. 어린 아기부터 소녀, 젊은 여성, 아내, 엄마까지 차곡차곡 진행되는 그림 한 장 한 장은 전시회에 온 것 같은 따스한 색감과 구도를 선사해 준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편안함을 주는 독특한 그림책이다.
이런 엄마의 이쁜 시절들을 그린 그림책이라니, 책을 읽은 아이는 후다닥 달려가 '우리 엄마도 어릴 적 나처럼 아기같이 이뻤겠다.'라고 뽀뽀해 주길 바라겠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하지 않겠지. 그래도 딸은 자란 후 꽤 정리한 그림책들 중에서도 이 책은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단지 그림책을 뺏어 읽은 어른은 작가가 그림책을 쓴 의도와는 다르게 아내의 아름다운 나날들을 연상하게 된다. 장인어른께 인사하러 갔을 때 봤던 쌔까만 초등 여자아이의 사진을 기억하고, 모퉁이 카페에서 순한 미소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대생을 떠올리고, 사회 생활하다 다시 학구열에 불탔던 졸업식을 생각한다. 이쁜 카페는 제쳐두고 맨날 삼겹살에 소주, 막걸리에 파전 먹던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흩날리는 꽃잎을 뚫고 행진하던 하얀 드레스의 웃음을 떠올린다. 입덧을 극복하게 해 준 와와포차 칼국수의 후루룩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생명의 울음에 감동을 머금은 미소를 기억해 내고, 산후우울증을 외면했던 슬픈 외침을 듣게 된다. 첫 펜션 여행의 사진 속 어설픈 웃음을 떠올리고, 찜질방에서 대판 싸웠던 슬픈 목소리를 기억해 내고, 긴급한 삶의 순간에 의연하게 대처하던 긴장된 얼굴이 떠오른다. 수행하듯 손바느질에 몰두하던 무심한 표정이 떠오르고, 폭발하듯 토해내던 일그러진 분노가 떠오르고, 깊이 안아주던 모자의 울음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 연애를 다시 하는 것 같은 지금의 웃음을 포착해 낸다. 그림책을 읽으며 아내와의 기억을, 그 미소를, 입었던 옷의 색깔을, 그날의 공기를, 울음 섞인 절규를, 그리고 아이 같은 웃음을 천천히 되돌아보는 내가 있다. 독특한 그림책이다. 이런, 슬그머니 연애감정을 가지게 하다니 이 정도면 그림책의 쓰임으로서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왠지 퇴근길에 아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순대 그리고 막걸리를 사 가야 할 것 같은 책이다. 아마 그날은 적어도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저녁이 될 것이다.
뭐, 그런 것이다.
이것이 뺏어 읽는 그림책의 힘이다. 다 큰 어른이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고하고 느끼고 감동을 받는 형국 말이다. 무르팍에 앉아 있던 딸은 멀뚱멀뚱 아빠의 감동받는 포인트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녀도 어린 시절의 그림책들이 책장 속에 남아 있다면 어른이 된 언젠가 다가오리라. 세상을 전혀 다른 경험으로 살아낸 어른들은 그림책을 읽으매 연상되는 무언가를 자동기술적으로 그림책 속에 대입하게 된다. 이 독특함은 각자 완벽히 다르기에 감정이 튀어나오는 포인트조차 종잡을 수 없다. 그런 그림책을 읽어 주던 경험, 도중 아찔하게 스치는 감동을 하나라도 가지게 된다면 행복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림책은 어른에게도 응당 그만한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림책, 감사합니다.
그간 행복한 경험을 선사해 준 그림책들을, 그리고 그 때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전해 보고자 글쓰기를 진행해 보았습니다. 짧은 듯 벌써 작지 않은 시간이 지났네. 준비했던 리스트는 끝이 났으니 이만 맺음을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림책 얘기는 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가 더 많았던 [뺏어 읽는 그림책] 시리즈. 함께 읽어 주시고, 좋아요, 댓글로 응원해 주신 많은 글벗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John Lennon 존 레논 and Yoko Ono 오노 요코 [Double Fantasy] 1980년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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