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네 한솥밥 <백석>
불현듯 말이다.
외워 부르고 싶은 시 하나 가슴에 간직하고, 애정하는 시인 한 사람 떠오른다면 누구나 인생 잘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몇 자 모르는 시집이지만 시인에 대한 사랑고백을 할라치면 많은 이들처럼 백석을 주저 없이 맨 앞에 내세우게 된다. 몇몇 작품 정도만 알고 있던 중, 2000년대 정본 백석 시집이 문학동네에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달음박으로 서점에서 구입해 읽어보고는 애정이 아찔하게 뻗어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정본답게 최대한 원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오탈자만 정리하고 어려운 옛 단어들은 주석을 달아 놓아 훨씬 친근하고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해외 명시가 있더라도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을 때 한계는 자명하다. 모국어로 읽는 시야말로 자국민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에 더해 백석 시인이 보여주었던 옛 정취 물씬 풍기는 토속적인 언어, 평안도 사투리를 시어로 삼아 전해주는 예스런 풍경들은 요즘 시대에 읽었을 때 독보적이고 더욱 간절하기도 하다.
한국어가 멋진 것 중에 하나는 색채어, 의성어, 의태어가 무지막지하게 발달한 것일 것이다.
아장아장과 어장어장, 겅중겅중이 깡총깡총, 하얀이 흐르므르꾸리죽죽, 누런에서 누르끼리끼리하기까지 얼마나 우리 맘에 쏙 드는 단어를 조합해 낼 수 있는가 말이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최대한 가깝고 섬세하게 조합할 수 있는 이 한국어의 강점은 백석의 시를 읽을 때 특히 가장 행복한 지점인 것 같다. 그 속에서 아와 어가 달라지고 오와 어가 옷을 바꿔 입어가며 표현하는 풍경들은 우선 그 낯섦에, 이어서 오는 적확한 묘사에 읽는 이를 순식간에 문장 속으로 빨아들이는 듯하다. 굴뚝에 연기가 이는 그림을 묘사할라치믄 가마솥 밥 짓는 구수한 냄새가 종이를 뚫고 나올 정도라고 얘기하면 수긍하실지…. 그러면서도 꽤 무심한 척하기도 하여 감정의 낭비가 없으니 모던보이의 도도함이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시들 또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하는 순간 그 맛이 완벽히 사라질 것이다. 일면 한국인만이 진가를 알 수 있는 백석의 운명이지만,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자랑스럽다.
백석은 해방 때 북으로 넘어간 이후 시집 말고도 어린이를 위한 동화시 여러 편을 발간한 일이 있다. 이런 백석이 발표한 동화시들을 가지고 일부 그림책을 발간한 출판사들이 좀 된다. 아마 저작권이 없다 보니 어느 출판사나 마음만 먹으면 그림작가와 함께 기획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는 좋은 의미일 것이다. 결국 그림책이란 형태로 아이든 어른이든 백석의 동화시를 하나라도 더 읽어 볼 기회가 된다면 말이다. 현재까지 동화시를 바탕으로 나온 그림책들은 다섯 가지 정도인데 <개구리네 한솥밥>, <집게네 네 형제>, <오징어와 검복>, <귀머거리 너구리>, <준치가시>가 그러하다.
<개구리네 한솥밥> 같은 경우는 대여섯 종이나 여러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는데 그만큼 착착 감기는 운율이나 아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줄거리로 인기가 많았었나 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었고 말이다. 다만 일부 출판사의 그림책은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백석 고유의 원문을 표준어로 바꿔 놓은 게 있는데 이런 책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그림의 특성에 따라 각자에게 마음에 드는 책이 선택될 것 같다. 판화 형식도 있고, 한국화 형식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책 전문인 보림출판사에서 유애로 그림작가와 만든 책을 읽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그의 시어가 리듬처럼 흘러나오니 아이를 무르팍에 두고 함께 읽는 맛은 참으로 찰지다. 공동체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줄거리이지만 자그마한 동물과 곤충들의 행태를 섬세하게 관찰하여 만들어 내었을 듯한 노래들은 해 질 녘처럼 따스하다. 한솥밥을 먹는 사이를 우리는 식구라고 하지 않는가. 함께 밥을 먹는다는 정서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한국인에게는 어떤 특별함을 주는 건가 보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고, 개구리는 닁큼 뛰고, 소시랑게는 엉엉 울고, 개구리는 뿌구국 물어본다. 쇠똥구리 우는 것이 가엾고 가엾어, 바쁜 길 잊어버리고, 디퍽디퍽 걷다가는 걱정한다. 가뿐 숨 허덕허덕 말 물으니, 이 다리 찌꿍 저 다리 찌꿍해서 흰밥 한솥 잦히어 모두모두 둘러앉아 한솥밥을 먹는다.
그 풍경이 이내 그리워져서 글 쓰다 고개를 든 창밖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 밥 먹을 시간이다.
그리고 다 큰 딸 아이와 오랜만에 자기 전 그림책을 읽어보고 싶어지네.
<별책 부록>
그림책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백석 시인을 애정할 수밖에 없는 글로 몰아갔다. 아저씨는 생긴 것도 우째 그리 멋들어지게 생겼나 말이다. 얼굴에 어린 순수함이 아름다운 우리말과 함께 겹쳐지니 오랜만에 잡게 된 시집에선 은은한 빛이 났다. 좋은 시간이었다.
여기 조금이라도 보이고 싶은 그의 흔적들을 말미에 짧게 담아 본다. 그리고 우윳빛 같은 하얀 마음을 그려보고자 조그마하게 음악 또한 선곡해 본다.
그 어딘가에서 눈은 아직도 푹푹 나리지 않겠나.
Belle and Sebastian [If you’re feeling Sinister] 1996년 <The Fox in the Snow>
https://youtu.be/bKSI1idOUzM?si=GWj5pGFlltzniR1s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비>
녯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흰밤>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오리 망아지 토끼>
자즌닭이 울어서 술국을 끓이는 듯한 추탕집의 부엌은 뜨수할 것같이 불이 뿌연히 밝다
초롱이 히근하니 물지게꾼이 우물로 가며
별 사이에 바라보는 그믐달은 눈물이 어리었다
<미명계>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여승>
오리야 나는 네가 좋구나 네가 좋아서
벌논의 눞 옆에 쭈구렁벼알 달린 짚검불을 널어놓고
닭이짗 올코에 새끼달은치를 묻어놓고
동둑 넘에 숨어서
하로진일 너를 기다린다
<오리>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함주시초 - 선우사>
초생달이 귀신불같이 무서운 산골거리에선
처마 끝에 종이등의 불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산중음 – 향악>
어늬 아츰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펴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절망>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복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 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외갓집>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추운 세상의 한구석에
맑고 가난한 친구가 하나 있어서
내가 이렇게 추운 거리를 지나온 걸
얼마나 기뻐하며 락단하고
그즈런히 손깍지벼개하고 누워서
이 못된 놈의 세상을 크게 크게 욕할 것이다.
<가무래기의 낙>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
디퍽디퍽 눈을 밟으며 터벅터벅 흙도 덮으며
사물사물 햇볕은 목덜미에 간지로워서
노왕은 팔짱을 끼고 이랑을 걸어
나는 뒤짐을 지고 고랑을 걸어
<귀농>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국수>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흰 바람벽이 있어>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