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의 유산과 자국우선주의 시대의 책임론

국제 법치주의 환경이 산업경쟁규제에 주는 시사점(1)

by 날개

세계은행(World Bank)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예상되던 시점에 국제통화기금(IMF)과 함께 '브레턴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에 의해 발족하여 1945년 설립되었다. 브레턴 우즈 체제는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 우즈에서 열린 연합국 회의에서 전후 국제 통화 질서 및 경제 협력을 위해 확립된 시스템으로, 고정환율제를 기반으로 하며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은행의 탄생 배경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 특히 미국 주도의 국제 경제 질서 재편이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 놓여 있으며, 이는 세계은행의 개발 원조를 통한 법치주의 확산 시도가 단순한 법적 제도의 이식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서구의 경제 및 사상적 가치를 세계 표준으로 확립하려는 거대한 기획의 일환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후크 교수 따르면, 20세기 후반 세계은행이 주도한 법치주의의 '국제화'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 1899-1992)가 주창한 합법성(legality)과 자유 시장의 관계에 대한 직관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세계은행은 법치주의가 채무국 정부의 공공질서 유지, 민간 부문 성장, 빈곤 퇴치에 기여한다고 보고, 개발 원조의 핵심 목표를 재산권 보장, 계약 이행, 범죄 최소화를 통한 시장 경제 구축과 민주주의 및 인권의 증진에 두었다.


2002년 은행의 법률 고문이었던 고융 퉁(Goong-Tong)이 말한 바와 같이, 법치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민간 부문의 성장'도 불가능하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나아가, 은행은 한 국가의 '법적 기원', 특히 영국 관습법과의 연관성이 경제 성장과 외국인 투자에 결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법적 기원’ 이론)를 직접적으로 활용하며 경제 규제를 재작성하는 데 투자를 집중했다. 이는 법치주의가 외부, 외국인 투자자의 관점에서 국가의 '투자처로서의 매력'을 높이는 도구, 즉 신자유주의적 시장 확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용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버드 경제학자 '로버트 바로'(Robert Barro, 1944-)가 지적한 바와 같이, 법치주의가 계약 집행, 부패, 전용의 위험과 관련하여 "투자자의 투자에 대한 관점"으로 평가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은행의 법치주의 기반 개발 원조는 제도적 측면과 이념적 측면 모두에서 심각한 비판에 직면했다. 제도적 실패의 예로서는 1990년대 후반 베네수엘라 프로젝트를 들 수 있는데, 법률 시스템 개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정부에 의한 사법부의 정치화로 인해 개혁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법 제도의 이식이 해당 국가의 고유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더 근본적인 비판은 세계은행이 '법치'라는 문구를 규제 완화 및 시장 확대 정책 목표를 추진하기 위한 도구로만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세계은행이 실제로는 법을 단지 "민간 부문과 자유 시장 촉진"을 위한 도구로만 취급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적 정책 의제는 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키고 채무국의 민주적 자치를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제기한 대표적인 학자로는 데이비드 케네디(David Kennedy, 1954-)와 같은 국제법 학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법치주의가 "민간 부문과 자유 시장 촉진을 위한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법이 진정으로 포괄적인 사회 정의와 공익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는 법치주의가 하이에크가 핵심 초점으로 삼았던 '자유'의 정신을 상실한 채, 단순히 시장 친화적인 제도적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음을 시사한다.


세계은행의 법치주의 확산 방식이 서구의 가치와 사상을 '돈'이라는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전 세계에 표준화하고 주입함으로써, 각 국의 고유한 문화적 다양성, 역사적 맥락, 사상적 자율성을 무시하고 사실상의 제도적·정신적 지배 종속을 야기한 것은 아닌가? 법치주의가 아무리 합리적인 최선의 방법일지라도, 그 확산 과정이 외부의 자본 논리와 특정 이익(특히 외국인 투자자의 이익)에 의해 좌우될 때, 이는 '선한 영향력'이 아닌 '규제적 제국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법치주의 담론의 쇠퇴는 2010년대 들어 세계은행이 분석 렌즈를 '거버넌스'로 전환하고, 법치주의 실현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친 '자체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제안함으로써 사실상 공식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냉전 이후 한동안 세계화를 주도했던 국제주의(globalism)와 표준화의 시대가 저물고, 자국 이익 우선주의(nationalism)가 득세하며 국제기구의 역할이 형해화되는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급자족을 꿈꾸며 해상 봉쇄 등 자국우선주의 통상 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 이상 특정 이데올로기나 제도를 타국에 강제할 동력이나 의지가 서구 선진국에 남아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는 세계은행이 주도했던 법치주의 확산 노력이 그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승리라는 배경 속에서 태동했으나, 그 배경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동력을 잃고 시들해진 시대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은행의 '정책적 금융'(Policy-based lending) 사례는 현재의 규제 담론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특히 ESG(Environmental, Social, Governance) 경영의 확산과 연계하여 살펴볼 수 있다. 현재 국민연금과 같은 세계적 투자가들은 기업이나 투자 대상을 평가할 때 ESG 지표, 특히 투명성과 책임 있는 지배구조를 중요하게 고려하는데, 이는 과거 세계은행이 법치주의라는 '투자의 전제조건'을 통해 채무국의 제도적 변화를 요구했던 행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즉, '투자 유치'(혹은 차관 지원)라는 경제적 유인을 통해 특정 정책 목표(법치주의 확산 혹은 ESG 가치 실현)를 투자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표준화하려는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돈을 통한 제도적 변화의 강요"의 과정에서 국가별 고유한 사회적·문화적 맥락이 무시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즉, 외부 자본이 획일화된 기준을 강요함으로써 개도국 및 중소기업의 불평등과 주권 침해를 심화시키고, 본래의 지속 가능성 목표에서 벗어나 단기적인 재무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변질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세계은행을 통해 확산된 법치주의의 국제화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보여주며 막을 내렸다. 이는 우리에게 규제 논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국제적인 바운더리에서 국내 경쟁법이나 산업 규제 논의로 시야를 좁히더라도, 규제와 투자의 관계, 규제 정책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미국과 같은 국가들은 과거 세계은행 등을 통해 자유 시장과 법치주의를 표준화하며 세계화를 주도했음에도, 이제는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책임을 회피하고 자국 우선주의적 단독 행동을 취함으로써 국제 산업경쟁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와 법치주의라는 자신들의 제도적 모델을 개발도상국에 적극적으로 이식하고 강요함으로써, 국제 경쟁 질서를 자신들의 청사진대로 설계하고 구축한 결과, 전 세계적인 상호의존성을 심화시켜 놓고서는, 이제는 변화된 국제질서에 따라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빠져나가는 것은, 자신들이 주도한 시스템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경제적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가 된다.


국제 경쟁법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의 장을 유지하고, 다국적 기업의 독과점 행위를 규제하며,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이익 우선 정책이 야기할 수 있는 세계 경제의 분절화를 막는 데 필수적이다. 미국은 세계 경제의 가장 큰 주체로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국제 경쟁 질서의 공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다른 국가들의 참여와 목소리를 반영하는 다자간 협력 체계 내에서 질서 재편에 임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이는 과거의 '강요'가 남긴 구조적 유산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이행인 동시에, 상호 의존적인 세계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서구 강대국이 과거 구축한 질서에 책임을 지는 행위는 비단 단순한 도덕적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붕괴라는 장기적 비용을 회피하고 국제 사회에서 규칙 제정자로서의 정당성과 전략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임을 주지해야 한다.


이어서 세계은행의 수혜자로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법치에 관하여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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