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라임 세포
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확실하길 바란다. 이렇게 걱정이 많다는 것은 감정이 기쁠 날 보다 우울할 날이 더 많다는 뜻이다. 이 걱정은 성인이 되면서 더 큰 덩어리가 되어 피부로 확 스며들었다.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패기로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뭘 한다는 것은 내 사전에 없었다.
나의 프라임 세포
유미처럼 나에게도 세포 마을이 있다면 나의 프라임 세포는 감성 세포일 것이다. 아마 출출이처럼 세포들 중 가장 거대하지 않을까? 그동안 내 슬픔들을 먹고 자란 세포니까. 내 감성 세포는 일할 때 빼고는 항상 활동했다. 혼자 있으면 무조건이었다. 특히 밤이 제일 활발한 활동 시간이다. 음악을 들을 때나 드라마를 볼 때,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이다. 어릴 때는 감성이 가 활동하는 이 시간들이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난 지금 그동안의 내 슬픔들을 뒤적거린다.
우우함을 달래기 위해 유일하게 한 것은 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최대한 슬프고 아련한 노래로. 자연스럽게 가사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모든 글자에 공감했다. 모든 노래가 내 얘기 같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그리고 또 하나는 에세이를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연에, 그 위로의 말들에 모든 감정을 쏟아부으며 공감했다.
내 안의 슬픔을 착취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 음악을 하는 사람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감정을 쏟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우울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물론 완전 일로서만 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경험만 한 게 없다. 나만 해도 힘들지 않았으면 굳이 감정을 풀려고 글을 쓰지 않았을 거다. 음악을 듣지도 않았을 거다. 그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해도 공감하기보다는 유희였을 거다. 이 모든 것들을 그냥 스쳐 지나갔을 거다. 그런데 나는 내 슬픔 덕분에 책에서 음악에서 깊이 있는 감정들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지금 내 안에 있던 감정들, 그동안 느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쓰고 있다. 한마디로 과거의 슬픔을 착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슬픔에 빠져 보냈던 시간들이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때 차곡차곡 모아두지 않았다면 난 지금 이런 일을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 또한 그 사람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다. 특히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 것이다. 물론 제가 예술을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떤 사람에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은 나중에 그 사람이 그 슬픔을 활용해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이 그 사람에게 미리 그 재료들을 주는 것일지도.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그것은 '슬픔'이라는 포장지를 싸고 온 '반전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슬픔도 마음 한편에 잘 닦아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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