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후루룩, 여름이 시작되던 날

by 나미

그날은 초여름답게 무더운 날씨였다. 습도 높은 공기와 뜨거운 햇볕이 뒤섞여 숨이 턱 막히는 날씨. 땀이 많은 리키는 냉면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마와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조금만 더 참아, 리키야. 곧 네가 잊지 못할 냉면을 만나게 될 테니까.’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오래된 평양냉면 전문점이었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메밀 향이 후각을 부드럽게 휘감았고, 그 순간 나는 어린 시절의 식탁 위로 순간이동한 듯했다.


그런 공간에 리키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따뜻했다. 나의 과거에 그가 함께 걸어 들어온 느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분명한 건 그날의 식사로 우리는 조금 더 '가족'이 되어갔다는 것이었다.


장소뿐만 아니라 오늘의 식사 자리는 특별했던 것은, 우리 삼촌과 외숙모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삼촌은 자타공인 냉면 마니아였다.


단골 냉면집만 해도 여럿이고, 주변 지인들에게만 수십 명을 소개했지만 실패한 적 없다는 자부심을 늘 갖고 계셨다.


“냉면, 제대로 먹어본 적 있어요?”

리키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삼겹살이랑 같이 나오는 거 먹어봤어요.”

삼촌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오늘은 진짜 냉면이 뭔지 알려줄게요. 여긴 내가 100명 넘게 데려왔는데, 다 성공했어.”

그 말에 모두 웃었고, 리키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메뉴를 바라봤다.


나에겐 어릴 적 가족들과 회식을 하곤 하던, 추억이 깃든 공간.
그런 자리에 리키가 함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마음이 이상했다.
과거와 현재가 포개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평양냉면과 이북식 만두를 주문했고, 잠시 후, 냉면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찬 기운이 그릇 주변에 살짝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그릇 안에, 살얼음이 동동 띄워진 육수는 은빛처럼 반짝였고, 잘 삶아진 메밀 면발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릇 속에 고요히 담겨 있었다. 그 위에 반으로 자른 삶은 달걀과 얇게 썬 오이채, 소고기 고명이 정갈하게 얹어져 있었다. 심플하지만 완벽한 균형. 코끝에 닿는 메밀 향은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게 번졌다. 리키는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더니 감탄했다.


“이게… 진짜 냉면이야?”


그는 처음엔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면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젓가락. 후루룩—
그 순간 리키는 눈을 감았다. 찬 기운이 혀끝을 스치고, 부드럽지만 탄력 있는 면이 입안에 퍼지며 메밀의 구수한 풍미가 번졌다.
처음엔 조금 밍밍하다고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젓가락을 먹을수록 그 얼굴엔 집중과 감탄이 뒤섞였다.

입 안이 시원하게 얼어올 때쯤, 그는 옆에 놓인 큼직한 이북식 만두를 크게 베어 물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 퍼졌다.


그리고 다시 냉면.
한 입, 또 한 입.
그는 말없이, 무아지경처럼 냉면에 집중했다.
가끔은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국물이 거의 남았을 때, 그는 젓가락으로 그릇 바닥을 살짝 뒤적이다가, 결심한 듯 두 손으로 그릇을 들어 올렸다.


“스페인에서는 이렇게 안 먹지만… 오늘은 예외야.”

육수를 한 모금, 두 모금.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삼촌은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봐봐. 내가 괜히 소개했겠어?"


그날 이후, 그는 삼촌을 ‘냉면 삼촌’이라고 부르게 됐다.

특별한 맛, 특별한 사람들, 그리고 특별한 하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를 산책했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붉은빛 노을이 골목을 타고 내려오던 그 저녁.
배가 든든하게 불러와서일까, 마음마저 포근하게 채워진 기분이었다.


그날 리키는 말했다.
“이런 음식을 너랑, 너의 가족이랑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뻐.”


나도 그랬다.


지금의 우리가 함께 현재와 미래를 꿈꾸고 있지만, 서로의 과거로는 함께 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추억이 깃든 식당에서, 의미 있는 음식을 함께 나눴다는 것은 나에게 깊은 위로이자 연결이었다.


우리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온기를 느끼며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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