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위로받고 싶은 날엔, 한강에서 라면
“리키야, 오늘은 같이 한강 가볼래?”
그날은 유난히 맑고 따뜻한 5월의 하루였다. 햇살은 뜨겁지 않고 살결을 간질이는 정도였고, 바람은 막 피어난 연둣빛 새순들 사이를 부드럽게 스쳐갔다. 그런 봄날, 나는 리키에게 한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곳은 내가 서울에서 살아가는 동안 지칠 때마다 발걸음을 향했던 곳이었다. 입시, 취업, 인간관계로 숨이 막히던 날들 속에서, 한강은 말없이 나를 받아주던 조용한 친구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곳. 숨을 돌릴 수 있었던 도피처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위로받았던 풍경이 그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었다.
우리는 한강에 한가로이 피크닉을 즐기러 온 여느 친구, 커플,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한강 텐트를 빌려 자리를 잡았다. 힘이 센 리키가 트롤리를 끌고, 볕이 잘 들면서도 한강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폈다. 벚꽃 잎이 바람 따라 흩날리고, 강가엔 연인들, 가족들, 친구들이 저마다의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휴대용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노래,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치킨 냄새.
리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여기, 정말… 평화롭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울컥하게 들렸다. 이해할 수 있었다.
리키도 마음이 많이 지쳐 있던 때였으니까.
우리는 모든 걱정들을 뒤로한 채 나란히 누워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쉬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람을 느끼며.
그러다 리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거, 진짜 오랜만이야.”
그의 눈물에, 나도 마음이 말랑해졌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닿았던 그 순간.
내가 항상 위로받았던 그 한강에서, 리키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 둘 사이의 감정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한강은 그날 처음으로, “우리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쉬다, 우리는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오고, ‘한강 라면기계’ 앞에 섰다.
한국의 편의점이 생경했던 리키는 라면 하나를 고르는 데도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걸 고르는 게 제일 좋아?"
"리키야, 잘 모르겠으면 신라면 골라도 괜찮아."
나의 조언에 그는 망설임 없이 신라면을 집어 들었다.
마치 보물이라도 손에 쥔 듯 조심스럽게 라면을 다루며,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한강 라면 기계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건 마법이야,” 리키가 웃으며 말했다.
“이 기계만 있으면 물 조절도 필요 없이 간편하게 라면을 만들 수 있다니… 너무 편리하다!”
신기해하며 웃는 그의 모습은 마치 순수한 아이 같았다.
K-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본 것 같다며, 리키는 라면이 완성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침내 라면이 다 끓자, 그는 조심스럽게 계란을 하나 톡 깨 넣고, 휘휘 저어 국물에 풀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진한 향이 퍼져왔다.
그 순간만큼은 한강 전체가 라면 냄새로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라면을 종이박스에 담아 조심스레 들고, 다시 텐트로 돌아왔다.
기다리던 순간.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한 젓가락씩 먹었다.
면은 쫄깃했고, 국물은 봄바람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혀끝을 맴돌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흔한 라면 한 그릇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먹는 라면은 달랐다.
바람과 햇살, 이야기와 감정이 모두 함께 끓여낸 맛이었기 때문이다.
리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이거, 그냥 라면이 아니야. 이건… 한강의 맛이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말없이 서로의 라면 그릇을 들었다.
그렇게 봄날의 한강에서, 우리는 작은 라면 두 그릇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그날 이후로, 리키는 말하곤 한다.
“한국 가면 제일 먼저 어디 가고 싶냐고? 무조건 한강이지.”
한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위로받았던 곳, 리키가 눈물을 흘렸던 곳, 그리고 우리가 함께 웃고 쉬어갔던 곳.
어쩌면 라면은 단지 라면일 뿐이지만, 그날의 한강에서 먹었던 라면은 우리에게 작은 기적처럼 기억된다.
따뜻했던 햇살, 부드러운 바람, 서로의 침묵을 이해해 주던 시간.
그날의 한강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 하루’를 선물해 준 날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그 강가에 앉아 라면을 끓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마음을 조용히 데워주는 국물 한 숟갈과 함께.